유튜브 속 잠자는 아기 고양이,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북카페 브이로그,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ASMR. 왜 우리는 이런 '조용한 것들'에 마음이 끌릴까?
이 '귀여움'에 대한 끌림은 뇌과학적으로 '아기 스키마(킨트헨스케마 Kindchenschema)'라는 본능적 반응과 연결된다. 큰 눈, 동그란 얼굴 등 아기의 특성이 뇌의 보상회로를 자극하고, 공격성을 낮추며 보호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다.
‘귀여움’은 단순한 미적 취향을 넘어, 우리 뇌가 안정감을 느끼는 심리적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보다 자극적이지 않은 것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큰 소리보다 작은 웃음, 강렬함보다 부드러움, 강요보다 기다림. 그 흐름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무해력(無害力)’이다.
지난 연초, 《트렌드 코리아 2025》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무해력(Power of Harmlessness)’을 제시한 바 있다. 연말이 가까워진 지금도, 이 '무해력' 트렌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오히려 더욱 큰 사회적 공감대를 얻으며 확산하고 있다. 이 트렌드는 심리적 피로와 정보 과부하에 지친 사람들이 귀엽고 조용한 것에 끌리는 자연스러운 감정적 선택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끌림은 단순히 감정일까, 아니면 우리 뇌가 보내는 절박한 생존 신호일까?
이는 당시 《트렌드 코리아》가 '무해력'과 함께 주목했던 '디자이저(Desizer)'의 등장과도 맞닿아 있다. 디자이저란, 자극 과잉 시대에 정보와 자극의 크기(Size)를 의식적으로 줄여(De-)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스트레스의 습격: 뇌의 '비상 브레이크'가 작동할 때
2023년, 미국의 신경과학자 스티븐 마이어(Steven Maier) 박사와 M. V. 바라타(Baratta) 연구진은 기존의 ‘학습된 무기력’ 개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뇌과학적 해석을 내놓았다.
연구 결과, 사람이 반복적으로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뇌의 '비상 브레이크'와 같은 '도르살 라페 핵(Dorsal Raphe Nucleus, DRN)'이 활성화되며 세로토닌이 과도하게 분비된다. 이때 뇌는 외부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스스로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며, 결국 우리 몸은 잠시 멈추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기력의 시작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통제감’의 유무에 있었다. 같은 스트레스를 경험하더라도, 평소 스트레스 대처 훈련이 잘 된 뇌의 '운전대(전전두엽)'는 이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제어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즉, 과거에 자신이 직접 상황을 통제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회복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 사람들이 무해하고 조용한 것에 끌리는 현상이 단순한 감정적 취향이 아니라, 더 해치지 않기 위해 뇌가 선택한 본능적인 생존 방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뇌가 스스로 '비상 브레이크'를 밟은 이 상태는, 최근 확산하는 '도파민 디톡스(Dopamine Detox)'가 왜 단순한 유행이 아닌, 뇌의 절박한 요구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무해함의 반격: 뇌의 '운전대'를 다시 잡는 법
하지만 뇌는 무기력에 머무르지 않는다. 최근 '도파민 디톡스' 혹은 '도파민 단식'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숏폼 콘텐츠와 같이 즉각적이고 강렬한 자극(도파민)을 의식적으로 줄이고, 뇌의 보상 시스템 민감도를 재조정하려는 능동적인 시도입니다. 무해한 사람, 조용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지혜롭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감정의 진화일 수 있다.
<Frontiers in Psychiatry>(2023)에 따르면, 반복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사람은 작은 실천과 선택을 통해 뇌의 '목표 지향적 회로(goal-directed circuit)'를 활성화할 수 있다. 그 회로는 뇌의 '운전대'인 전전두엽, 그리고 도파민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어, 자신이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뇌는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나 회복을 시작한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 한 잔, 하루의 정리를 돕는 짧은 일기,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말 한마디. 이 작은 무해한 행위들이 뇌에는 강력한 자가회복 신호가 된다.
이는 단지 감정의 미덕이 아니라, 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자극하는 생물학적 회복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해력'을 실천하는 '디자이저'들의 능동적인 브레인케어 방식이다.
▲ 뇌는 왜 '귀여운 것'에 끌리는가: 무해력과 브레인케어의 뇌과학 _ '도파민 디톡스' 시대, 지친 뇌가 보내는 생존 신호 읽기
<'디자이저'를 위한 무해력 브레인케어 5가지>
감각 깨우기 : 좋아하는 향의 차를 마시거나,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잠시 휴식하기
작은 성취감 : 침대 정리, 식물에 물 주기 등 눈에 보이는 작은 목표 달성하기
하루 5분 기록 : 오늘 나를 웃게 한 일, 감사한 일 한 문장으로 적어보기
판단 없이 듣기 : 누군가의 이야기를 해결책 제시 없이 끝까지 들어주기
디지털 디톡스 : 잠들기 30분 전, 스마트폰 대신 창밖을 보거나 조용한 음악 듣기
조용한 치유: '브레인케어'는 가장 능동적인 자기보호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오주원 학과장은 이렇게 강조한다.
“무해함은 뇌를 해치지 않기 위한 본능적 반응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선택을 통해 뇌를 회복시키는 ‘브레인케어(Brain Care)’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무해력’은 결코 소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친 뇌와 마음이 선택한 가장 능동적인 치유 방식이다. 말없이 곁에 있는 존재, 강요하지 않는 사랑, 조용히 기다려주는 친구. 그들이야말로 지금 세상에 꼭 필요한 무해한 회복의 불씨가 되어준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침묵하고 물러서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부당함에 맞서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는 '무해력'은 회피가 아닌 '회복'을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며,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현명한 쉼표와 같다.
당신이 오늘 선택한 작은 무해함은 세상을 바꾸기 이전에, 먼저 당신의 뇌를 구하고 있다. 자극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저'로서, 의식적으로 '도파민 디톡스'를 실천하는 이 고요한 선택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세상을 가장 강하게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글. 장인희 객원기자 heeya71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