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이후, 몸보다 오래 남는 마음의 상흔
최근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수많은 이재민과 자연 생태계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불은 꺼졌지만, 마음 속 불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스치는 연기 냄새에도 몸이 경직되고, 꿈속에서도 화염 속을 달리는 심장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재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플래시백', 불안과 경직, 과도한 경계 반응, 수면 장애 등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물리적 화상보다 오래 남는 심리적 상흔이 더 깊은 경우도 많다.
트라우마는 뇌에 '생존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트라우마는 단순한 심리 상태를 넘어 뇌의 구조적 반응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편도체(Amygdala)는 공포와 위협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중심 구조로, 강한 공포를 경험한 후 이 기억이 이 부위에 강하게 각인되면 비슷한 감각 자극(예: 연기 냄새, 사이렌 소리)에 반사적으로 공포 반응이 나타난다.
또한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Prefrontal Cortex) 기능이 위축되면 사고와 감정의 통합이 어려워지며, 극단적인 반응이나 회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괜찮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이다. 몸이 기억하고, 뇌가 반응하기 때문에 단순한 의지나 위로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뇌 기반 트라우마 회복 – '뇌돌봄'의 필요성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나 심리적 지지 이상으로, 뇌 신경계의 안정과 감정 회로의 재조정이 핵심이라는 연구들이 다수 발표되고 있다.
국제트라우마연구저널(Journal of Traumatic Stress)에 따르면 "감각 기반의 회복 기법은 편도체 과활성화 상태를 완화하고 자율신경계의 이완을 촉진시킨다"고 보고되었다.
'뇌돌봄(Brain Care)'은 이러한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감각 자극, 호흡 조절, 자연 접촉, 전두엽 활성 활동 등을 통해 뇌의 반응 시스템 자체를 안정화하고 회복력(resilience)을 회복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뇌기반 트라우마 심리치료의 전문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오주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트라우마는 혼자서 이겨내기 힘든 벽처럼 느껴지지만,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작은 숨결 하나, 따뜻한 접촉 하나, 진심이 담긴 일기 한 줄의 뇌돌봄이 당신 안의 회복 본능을 깨우기 시작한다"
다음은 오주원 교수가 제안하는 산불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뇌돌봄의 방법이다.
▲ 산불 트라우마, 뇌가 기억하는 불안… 회복은 '뇌돌봄'에서 시작된다
산불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뇌돌봄 실천 가이드
① 호흡을 통한 안정화: '숨을 쉰다는 감각' 되찾기
아랫배 깊숙이 숨을 천천히 들여마시고 3초간 멈춘 후 다시 내쉬기를 5~10분간 반복한다. 이런 깊은 복식 호흡은 미주신경계를 활성화시켜 뇌파가 안정되고 자율신경계가 이완되어 편도체의 긴장을 완화한다.
② 감각 자극: '지금 여기, 나는 안전하다' 신호 보내기
머리나 가슴, 손목을 두드리고,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거나 냉온 찜질을 하게 되면, 촉각을 자극하여 과거나 미래에 가 있던 의식을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하여, 뇌의 과도한 각성을 완화하여 안전감을 회복할 수 있다.
③ 전두엽 깨우기: 감정일기로 '지금-여기'에 나를 초대하기
하루 중에 느낀 감정을 일기로 기록하는 감정일기 쓰기는 트라우마로 인해 놀란 뇌간과 변연계를 뇌의 더 높은 수준인 피질(합리적인 사고)과 통합하는 과정을 촉진하여, 생리적 스트레스 반응이 점차 완화되도록 돕는다.
④ 자연 명상: 자연과의 교감 회복
맨발로 흙을 밝고 나무에 손을 얹으며 자연의 생명력을 받아들이고 피부로 바람을 느끼며 걷는 것은 우리의 뇌파를 알파파 또는 세타파 상태로 전환되게 하여 편안함, 스트레스 감소, 감정적 안정과 연결되며, 심리적인 회복을 돕는다.
회복의 시작은 '안전함의 재학습'
트라우마는 '위협'을 기억하지만, 뇌는 '안전함'을 재학습할 수 있다. 신경계는 반복된 감각적 안정 경험을 통해 다시 평온한 기억을 덧입힐 수 있으며, 이러한 체험은 회복의 전환점이 된다.
자연처럼, 마음도 다시 피어날 수 있다.
생태학적으로 산불은 일부 숲 생태계의 자연 리셋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일부 식물은 불을 겪은 후에만 발아하며, 타버린 나무들은 재로 돌아가 새 생명의 양분이 된다.
▲ 산불 트라우마, 뇌가 기억하는 불안… 회복은 '뇌돌봄'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뇌와 마음도 마찬가지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생명이 움트듯, 트라우마 이후에도 회복은 가능하며, 뇌돌봄이라는 작은 실천으로 시작할 수 있다.
심리적 트라우마는 개인의 몫이 아닌, 사회 전체의 회복과 포용이 필요한 공감의 과제이다. 뇌를 향한 따뜻한 관심과 돌봄의 실천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더 건강하고 회복탄력성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장인희 객원기자 heeya71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