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마고신화와 에덴신화 11번째 글은 두 신화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신화를 지은 이들이 인간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었는지를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고 쓰겠습니다.
<부도지>는 마고성의 사방에서 네 명의 천인天人-황궁黃穹씨, 백소白巢씨, 청궁靑穹씨, 흑소黑巢씨-이 관管을 쌓아놓고 음音을 만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음’으로써 천지조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다음에 두 궁穹씨(황궁, 청궁)의 어머니는 궁희씨요, 두 소巢씨(백소, 흑소)의 어머니는 소희씨이고, 궁희와 소희는 마고의 딸이라고 역으로 추적하여 근원인 마고까지 올라갑니다.
▲ 백소씨족의 지소씨가 포도를 먹고나서 이를 사람들에 권하며 인간은 본성을 잃고 오감과 욕망에 휩싸여 타락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신이 등장하고 여섯 째날 창조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에덴신화와는 다른 전개입니다. 마고신화의 인간도 마고에서 단계를 거쳐 탄생하지만 이야기는 네 천인을 먼저 보여주며 시작됩니다. 이는 마고신화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간이고, 에덴신화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임을 암시합니다.
이미 앞글들에서 말씀드렸듯이 마고신화에서 인간은 마고의 자손으로 마고의 신성을 물려받고 태어났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며, 하늘과 땅과 그 사이 모든 것들을 조화시키는 주체입니다. 그들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내 안의 율려, 자재율(自在律 아무런 구속이나 강제 없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함. 편집자주)에 따라 살았습니다.
마고의 자손들은 본래 땅에서 나는 지유地乳를 먹고 살았는데 백소씨족의 지소씨가 포도를 맛보고 권하여 많은 이들이 포도를 먹었습니다. 이를 오미五味의 화禍라고 합니다. 그들은 오감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백소씨 사람들이 포도를 먹지 못하게 감시(수찰守察)하자, 율려에 어긋나는 일은 강제로 금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금하는 ‘자재율’이 깨지게 됩니다. 내 안의 하늘을 잊고 감각과 욕구로 살게 된 인간은 마침내 천성을 잃고 짐승처럼 생긴 아이들을 낳게 됩니다. 사람들이 지소씨를 원망하고 타박합니다. 이때 지소씨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을 크게 부끄러워하며 책임을 지고 무리를 이끌고 ‘스스로’ 성을 나갑니다.
▲ 오미의 화가 일어나 사람들이 욕망과 타락으로 다른 생명을 헤쳐 생명을 영위하며 수명이 유한하게 되었다.(사진출처-선도문화진흥회 홈페이지)
이렇게 성을 나간 무리들 중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지유를 얻고자 성곽 밑을 파헤치니 성터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성 안의 지유가 마르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게 됩니다. 성은 그 맑고 깨끗함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에 제일 어른인 황궁씨가 오미의 책임을 지고 마고 앞에 나아가 사죄하고 인간의 본래 모습, 본성을 되찾겠다(복본復本)는 서약을 합니다. 모든 종족들을 불러 모아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합니다. 그 결과, 성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서 성을 나오기로 결정합니다. 지소씨의 1차 출성도, 마고성 공동체 전체의 2차 출성도 인간들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지 마고가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잘못된 선택에 뒤따른 결과를 책임졌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도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은 그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 라파엘로의 아담과 이브.
반면 에덴신화에서는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 김혜윤 수녀는 “모든 것이 그 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이라는 고백과 연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나 역시,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내 삶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에덴의 인간은 궁극적으로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정작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신께 오로지 복종해야 되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신학자 존 프레임은 “그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종”이라고 하였고, 오태환도 “인간은 주인이 아니고 ‘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인간 삶의 주인은 신이고 인간은 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에덴의 인간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해 찰스 하트숀은 “자신들이 무슨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미 다른 자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꼭두각시와 같다”고 했습니다. 또, 오마르 카이얌은 그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두는 체스판의 무력한 말들입니다”라며 인간의 무력함을 표현했습니다.
이런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며 그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종’일 뿐, 자기 삶을 책임 질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이 신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먹어 죄인이 됩니다. 4~5세기에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범한 아담에 대해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죄로 완전히 부패했으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죄를 범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불결한 근원에서 난 후손은 나면서부터 죄에 전염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원죄론’은 아담의 죄는 후손과 무관하다고 주장한 동시대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제치고 서방기독교의 주요교리로 정착되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캘빈은 “유아들은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죄의 종자’를 가지고 있고 본성 자체가 죄의 종자”라 하였고, “죄의 극복도 사람의 힘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은총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존 프레임은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오히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죄지은 것에 대해서 어떠한 대책도 없이, 미래에 대해서 아무 비전도 없이, 저주 받고 에덴에서 황망히 쫓겨나기만 합니다. 그의 미래는 오직 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신이 구원해줄 때까지 그는 벌로 주어진 고통스런 죄인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1600년을 대물림하며 내려온 “인간은 ‘죄인’”이라는 인식은 요즈음도 전단지 같은 데서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태곳적 아담이 지은 죄로 인간은 아직도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세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입니다. 아니 갈수록 더 엉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죄의식에 갇혀 지냈던 어두운 시간이 나 자신과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도仙道를 만나 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에서 나왔으며, 제게도 그 ’하나‘의 조각이 들어와 있다는 깨달음이 저 자신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귀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이 새로운 관점이 저를 일으켜 세웠고, 저를 밝게 만들었으며, 제가 밝아짐으로 주위도 밝히게 되었습니다.
▲ 도메니키노의 그림. 하나님이 금지를 어긴 데 대한 힐책을 하자 변명하는 아담의 모습.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봅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선택하면 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신성을 가진 빛나는 존재라 선택하면 빛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죄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후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에덴신화의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에 갇혔습니다. 인간은 그 죄에 대해서 속수무책이고 신만이 죄에서 인간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 마고신화의 인간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잘못에 갇혀 죄인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고신화의 인간은 잘못을 책임지고 성을 나왔습니다. 인간들의 본성을 되찾겠다는 삶의 목표를 정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황궁씨와 그 후손들이 수천 년을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의 결실이 역사로 나타난 것이 홍익본성에 기반을 둔 배달국이요, 단군조선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한 바퀴 돌고 새로운 시작점에 왔습니다. 새해는 새롭게 시작하라고 새해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살아온 시간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감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어떤 과거를 살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떤 선택으로 어떤 미래를 창조해 나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새해입니다. 이제까지 낡은 습관대로의 선택을 버리고 밝고 환한 선택을 하십시다. 파이팅!
▲ 김윤숙 기고가/ 국민인성교육 강사, 찬란한 우리 역사이야기 강사.
▲ 마고성을 나오며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여 돌아오겠다는 복본의 맹세를 하는 장자 황궁씨와 마고성 사람들.(출처: 선도문화진흥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