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9번째 글은 마고신화의 자재율自在律과 에덴신화의 선악과 금기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둘 다 사람이 무엇을 중심으로 살 것인가 하는 삶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마고신화의 마고는 우주의 법칙인 율려로써 창조를 해나갑니다. 그 율려가 내 안에 들어온 것이 ‘자재율自在律’입니다. 마고성 사람들은 자재율에 따라 살았습니다. 에덴신화의 선악과 금기는 인간이 신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잣대가 됩니다. 에덴신화에서는 신의 말씀이 살아가는 기준입니다.
율려에서 나온 마고는 율려를 타고 창조를 해나갑니다. 율려는 우주 만물의 존재원리입니다. 마고 기에너지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확장하고 수렴하며 사물과 현상을 창조해 나가는데 ‘율려’라는 법칙과 리듬, 질서에 따릅니다. 율려는 역동적인 질서이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리듬입니다. 내가 그 리듬으로 숨 쉬고 내 심장이 그 리듬으로 박동합니다. 율려는 우주 만물의 배후에서 생명의 흐름을 관장하는 경이로운 질서입니다. 율려는 우주를 운행하며 지구를 돌게 합니다.
율려는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법칙입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율려로 생겨나고 머물다가 율려 따라 사라집니다. 또한 율려에 예외는 없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고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칙의 엄정함과 무정함이 어느 작은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마고의 크나큰 사랑입니다.
▲ <제목: 타락의 시작- 오미의 화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우리 민족은 하늘을 숭상해온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하늘님은 우리 민족만을 사랑하고 지켜주며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고 거스르면 저주를 내리는 신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요 법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소리를 합니다. 그 말 속에는 한 치의 사사로움도 없이 법을 이행하는 하늘에 대한 공경심과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하늘의 법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공명정대하게 행해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우주의 질서, 하늘의 섭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율려와 하나 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마고성 인류시조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안에 율려가 있음을 알았고 그 율려에 따라 행하고 살아갔습니다. 그 자기 안의 율려를 ‘자재율自在律’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의 섭리에 맞지 않는 것은 강제로 금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지 않으며 내 안의 하늘의 소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소씨가 포도를 맛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도를 먹었습니다. 포도를 먹은 이들은 감각과 욕망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것을 선도에서는 오미五味의 화禍라고 합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더 이상 포도를 못 먹도록 금지시킵니다. 마고성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위적인 금지법이 생긴 것입니다. 아무런 구속과 강제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하던 ‘자재율’이 파괴된 것입니다.
결국 포도를 먹은 이들 뿐 아니라 포도를 먹지 못하도록 지키는 이들도 율려에 의존하여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 안의 하늘의 소리와 단절된 사람들은 천성을 잃어버리고 모습도 이상하게 변하여 더 이상 마고성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자재율은 파괴되었지만 마고신화는 자재율로 살아가는 인간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며 우리가 회복해야 될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럼 에덴신화에서는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얘기하고 있을까요? 에덴신화 첫째 이야기의 ‘엘로힘 하느님’은 인간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이렇게 살도록 명합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1장28절)
에덴신화 둘째 이야기의 ‘야훼 하느님’은 풍요로운 낙원인 에덴동산에 아담을 데려다 놓으시며,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창세기>2장 16절, 17절)고 합니다. 온갖 먹거리가 제공된 에덴동산에서 단 하나 금지된 것,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만, 이 한 가지 금기가 사실은 인간이 신에게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를 시험하는 잣대입니다. 아담은 순종하지 않아 저주받고 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과연 인간에게 선택할 권한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께 순종해야만 되는 존재입니다. 순종하면 축복이요,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입니다.
그런데 신이 금지한 것이 왜 하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였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신성神性은 ‘선과 악을 아는 지혜’와 ‘영원한 생명’으로 상징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감히 신의 영역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선악과를 먹어 지혜를 얻은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마저 먹고 영원한 생명까지 얻게 될까봐 인간을 내쫓고 생명나무에 영원히 접근할 수 없게 막습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도 금지시킵니다. 아담의 잘못은 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동시에 피조물인 자기 분수를 넘어 신의 영역을 넘봤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덴신화의 두 이야기는 인간은 피조물이니 자기 분수를 알아 신이 내려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이상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고신화는 인간이 자재율을 따라 살았을 때 하늘과 땅과 그 사이 만물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이상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굉장히 양심적인 사람을 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은 자기 안의 양심의 소리, 양심의 법에 따라 살기 때문에 외부의 강제적인 법 없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언정 전혀 피해주지 않으며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저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양심이 한 가닥 남아있는 자재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려고 하면 양심은 자기가 있음을 주장하며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그 짓을 안 하고 말지요. 또 죄를 짓고도 잡히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으로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법 이전에 양심의 법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개인차가 참 큽니다.
인간이라면 모두 양심을 타고 나지만 양심이 있는 것을 못 느끼는 사람들도 있듯이, 율려도 지금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자각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안의 율려, 자재율을 회복하는 첫 걸음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양심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양심 따라 사는 것이 때로는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양심 따라 사는 쪽이 편한 것은 그 쪽이 우리의 원래 모습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쓰고 있는데 제 양심이 저를 찌르네요.
▲ 김윤숙 기고가/ 국민인성교육 강사, 찬란한 우리 역사이야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