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10편]인간과 신성

[기고-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10편]인간과 신성

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마고신화와 에덴신화 10번째 글은 인간과 신성神性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신화를 지은 이들은 과연 사람에게 신神의 속성, 신의 마음인 신성이 있다고 보았는지 아니면 없다고 보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두 신화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마고신화에서 인간은 마고의 자손입니다. 마고가 궁희‧소희를 낳고, 궁희‧소희는 4천녀‧4천인을 낳고 4천녀‧4천인이 결혼하여 인류의 시조들이 태어납니다. 마고는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우주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조화주입니다. 마고가 인간을 태어나게 한 목적은 마고와 함께 조화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 마고와 두 딸 궁희, 소희가 우주의 안정을 위해 활약하는 모습.<제목 '궁희와 소희'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우주의 모든 것은 마고 기氣에너지가 우주 조화의 법칙인 율려를 따라 펼쳐진 것입니다. 우주만물은 마고에게서 수만 가지로 다양하게 피어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 중 인간은 마고의 직계 자손이므로 창조주이며 조화주인 마고의 신성을 제대로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마고의 창조를 도와 온 세상을 완전한 조화에 이르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인간은 신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근원인 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자신 안에 빛나는 신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만물이 모두 하나인 신에서 나온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부분이 아닌 전체를 하나로 인식하며, 구분 짓지 않고 모두를 품는,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고의 큰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 큰 사랑이 홍익하는 마음입니다.

해안가 모래밭에 엎드린 채 발견된 5살짜리 시리아 난민아이의 주검 사진 한 장에 전 세계가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 여파로 난민정책이 바뀌기도 한 것을 보면 인류에게는 인종과 나라를 초월한 이 본성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이 홍익 본성은 평소에는 에고의 본능과 욕구에 가려져 별로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가 자신을 뛰어넘어 ‘큰 나’를 느낄 때, 가슴 뭉클하게 거기 있음을 알게 합니다.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미숙아 쌍둥이가 한 인큐베이터에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다른 아이는 처음부터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살려내려 최선을 다했지만 희망이 없자 사람들은 그 아이를 포기하고 인큐베이터 한쪽 구석에 제쳐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인큐베이터를 찾은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포기한 그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었는데 그 이유는 쌍둥이 중 건강한 아이가 그 아이를 안아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고난 홍익의 본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마고의 자손인 인간은 마고에게서 신성을 물려받아 태어납니다. 우리가 그 신성을 발현시켜 신성과 하나가 되면 우리는 마고의 창조성으로 우리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고, 마고의 조화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생명들과 조화롭고 평화롭게 마고의 큰 사랑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 궁희와 소희가 낳은 네 천인이 각각 창조과정에서 역할을 하는 모습.<제목: 네 천인의 역할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 선도문화진흥회>.

이제 에덴의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에덴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인간은 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신이 만든 세상을 신을 대신해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엘로힘하느님’은 초월적인 신으로, 세상의 밖에서 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피조세계를 다스리지만 피조물일 뿐입니다. 창조주와 피조세계는 절대 구분되고 분리되어 있어 인간은 신에게 신성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창조이야기를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술가가 아무리 혼을 다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작품은 예술가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객관적인 대상일 뿐, 작품이 예술가의 유전자를 물려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술가는 신이며, 유전자는 신성, 신의 작품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입니다. 즉, 신의 유전자인 신성이 작품인 피조물 인간에게는 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인간은 ‘야훼하느님’이 불어넣어준 입김으로 숨을 쉬고 생명을 얻습니다. 앞서 9번째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신성은 여기서 선과 악을 아는 지혜와 영원한 생명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신성을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를 어겼고 낙원에서 추방됩니다. 아담을 추방한 후에, 신은 생명나무를 인간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인간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합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자유의지는 명백히 신의 용어로서 오직 거룩하신 하느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신이 금한 것을 자기 마음대로 먹어 자기를 신의 위치에 두려고 한 것이 됩니다. 신학자 오태환은 “이를 ‘원죄’라 부르는데 죄의 본질은 ‘오만’이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반역적 시도가 죄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에게 순종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스스로 신처럼 행동한 것이고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

에덴신화의 두 이야기에서 신은 엘로힘하느님과 야훼하느님으로 서로 다르지만, 양쪽 모두에서 신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에덴신화는 신과 사람이 분리된 신인분리의 문화입니다. 간혹 신인합일을 주장한 엑카르트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에덴문화에서는 이렇게 사람이 신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죄인 반면, 마고의 문화인 선도仙道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발현시켜 신처럼 살라고 합니다. 내 안에 신이 물려준 신성이 있음을 깨달아 그 신성과 하나 되라고 합니다. 신처럼 되어서 신의 뜻, 신의 법칙, 신의 사랑과 하나 되어 살라고 합니다. 마고신화는 신인합일의 문화입니다.
 
부도지에 나타난 마고는 인간에게 이래라 저래라 개입하지 않습니다. 에덴의 신은 인간에게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명령합니다. 신의 말씀은 후에 율법이 되어 율법을 따르면 신의 축복을 받고, 거스르면 벌을 받습니다. 저는 이렇게 신이 일일이 지침을 내리고 상벌로 인간을 다스려야 하는 이유가 인간에게 신성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면 마고가 지켜만 보는 신일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신성을 넣어주었고, 신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마고신화는 신인합일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에덴신화는 신인분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신인합일과 신인분리를 가르는 잣대는 신과 연결될 수 있는 신성이 인간에게 주어졌는가에 있습니다. 마고신화에서 인간은 마고가 낳은 자손이라 마고의 신성을 물려받았습니다. 에덴신화에서 인간은 신이 만든 피조물일 뿐 신성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과 이어줄 중개자가 필요합니다.

모든 생명이 조화롭고 안정되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간을 만들 꿈을 함께 이뤄내기 위한 동반자로 마고는 인간을 탄생시켰습니다. 마고의 자손인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성과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명을 함께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성을 회복하여 그 사명을 제대로 해내주기를 마고는 묵묵히 지켜보며 믿고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 김윤숙 기고가/ 국민인성교육 강사, 찬란한 우리 역사이야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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