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8편] 하나에서 나온 하나

[기고-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8편] 하나에서 나온 하나

 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마고신화와 에덴신화 8번째 글은 ‘모두는 하나에서 나온 하나’라는 정신으로, 분리하고 구분하기보다 조화와 화합으로 하나 되어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철학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 정신은 마고신화에 담겨있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 잠재해 있어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습니다.
 
 TV에서 촛불집회 현장을 보았습니다. 아빠에게 안긴 갓난아기부터 팔순을 넘은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 각층의 사람들이 나와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지난 주말(11월26일) 열린 촛불집회에는 첫 눈이 내린 영하의 추위에도 주최 측 추산 전국 190만 명(경찰 추산 33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는 평화로운 시위였고 나중에는 마치 축제 같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시위가 끝난 거리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것이 안 믿어질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신문에는 한 곳의 시위대가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경찰을 단체로 안아주었다는 소식까지 실려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요즘 두 사람만 모여도 하게 되는 정치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장면들은-상황은 전혀 다릅니다만-국민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응원했던 2002년 월드컵 때, 그 뜨거운 열기와 가슴 뭉클하던 감동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제같은 응원을 했어도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았었지요. 그리고 그때 “대~한민국!”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말이 “이렇게 하나된 건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우리 모두가 하나 됨’을 그때 처음으로 가슴 뜨겁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월드컵 4강까지 오를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것처럼 그 모든 것은 전혀 기획되거나 계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모습, 하나 된 우리의 모습에 놀랐고 세계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모습은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DNA 속에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우리 선조들의 정신이 발현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 선조들의 삶과 사유가 마고신화에 담겨 있습니다. 마고성에 살던 인류의 시조들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하나에서 나온 하나’로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사람과 차별하지 않았으며, 인간끼리도 구분하고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만물과 차별이 없었음은 포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 지소씨가 배고픔을 참지못해 포도를 따 먹게 되면서 인류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제목: 타락의 시작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마고성의 사람 수가 늘어나자 땅에서 나오는 ‘지유地乳’를 마시기 위한 줄이 길어집니다. ‘지소’란 사람이 자기 차례를 다섯 번이나 양보를 하여 마시지 못하고 보금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는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가 난간의 넝쿨에 달린 포도를 맛보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포도는 그들에게 먹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과 똑같은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포도의 강력한 맛을 경험한 지소씨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도를 먹게 됩니다. 이 사건을 포도의 다섯 가지 맛으로 인한 재앙이라 하여 ‘오미五味의 화禍’라고 부릅니다.

 포도를 먹은 사람들은 본바탕(性相)이 변해 갔는데,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이齒가 생겼으며, 그 침은 뱀의 독과 같이 되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풀 한 포기, 열매 하나도 나와 똑같은 가치를 가진 한 생명으로 존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제외한)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고 한 에덴신화 야훼의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구약성서》<창세기>2장16절, 17절)

 인간들끼리도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어 살았다는 것은 다음의 두 경우를 통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포도를 먹은 자들과 못 먹도록 감시한 자들이 성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제일 어른인 황궁씨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몸과 마음을 열심히 닦아 어리석음을 씻고 다시 천성을 되찾으라고 당부합니다. 나와 분리되어있는 상관없는 ‘남’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우리’이기 때문에 힐난하기보다 불쌍한 마음이 앞서고 천성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 마고성 제일 어른인 황궁씨는 '오미의 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복본(復本)의 맹세를 한다.<제목 '복본의 맹세'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두 번째 경우는 지소씨 등의 잘못으로 마고대성이 위험에 처하자, 잘못도 없는 황궁씨가 장자로서 책임을 지고 마고 앞에 나가 사죄를 합니다. 이는 비록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공동체 중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 나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미의 화’가 초래한 결과를 모두가 책임지고 성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담이 잘못을 저지른 후에 전개되는 에덴신화의 장면을 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야훼하느님이 아담을 추궁합니다. 그러자 아담은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고 핑계를 댑니다. 야훼께서 여자에게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물으시자 여자도 핑계를 대었습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야훼는 뱀에게는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힐 저주를 내립니다. 여자에게는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할 저주를, 아담에게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 저주를 내립니다. 그리고는 “선악과를 먹어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며 에덴동산에서 내쫓았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Temptation and Fall, 시스티나 성당.

  이렇게 아담을 쫓아낸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cherub;보통 네 발 달린 동물의 몸체에 사람의 머리와 두 날개를 지닌 스핑크스 였음, 필자 주)들을 세우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했습니다. 여기까지 《구약성서》 <창세기>3장11절~24절의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잘못에 대한 반응이 마고신화와 이렇게 다른 이유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저주를 내리고 쫓아내는 것도, 자기 책임을 면하려고 옆 사람 탓을 하는 것도 모두 너와 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객관적인 ‘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갈등으로 불타오르는 폭력 시위도 할 수 있고, 화합으로 하나 되어 세계가 놀라는 아름다운 시위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고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느 쪽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줍니까? 어느 쪽이 당신 가슴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 줍니까? 우리는 그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왔지만 우리의 DNA는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내 안에 잠재해있는 선조들의 얼에게 물어보시면 어떨지요? 

▲ 김윤숙 기고가/ 국민인성교육 강사, 찬란한 우리 역사이야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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