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7번째 글은 한민족의 창세신화인 마고신화와 널리 알려진 구약성서의 에덴신화의 비슷한 점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첫번째 글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두 신화는 첫째, 신과 함께 낙원을 이루고 살다가 과일을 먹는 잘못을 저질러 신에게서 분리되어 나오는 이야기 구성이 비슷합니다. 그 과일이 마고신화에서는 ‘포도’이고 에덴신화에서는 ‘선악과’입니다.
▲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1504).
둘째, 두 이야기 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고신화에서 인간은 마고가 낳은 궁희․ 소희의 후손입니다. 만물 중에 마고의 신성을 제대로 물려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에덴의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지어지거나(P문서), 신이 불어넣어준 입김으로 생명을 얻게 된(J문서) 존재입니다. (P문서, J문서의 내용은 칼럼 4편 참조) 이는 신들이 노동력이 필요해 인간을 만들어내는 메소포타미아의 창세신화 ‘에누마 엘리쉬’와 비교해도 인간의 존재가치와 존엄성이라는 면에서 훨씬 앞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를 비교해볼 때,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한 이해가 조금 다릅니다. 에덴신화에서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지만 신의 형상을 닮아있어 피조세계에서 우월한 위치와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다만 인간의 존엄성은 ‘신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에만’이라는 조건과 제한이 붙어 있습니다. 반면 마고신화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천지간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내는 역할과 책임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셋째, 마고신화에서는 ‘소리(音)’가 창조와 조화를 이루어내는 큰 역할을 합니다. 에덴신화에서 신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합니다. 그 ‘말씀’도 ‘소리(音)'라 생각한다면 비슷한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역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선도에서는 ‘모든 존재가 그것에서 나와서 그것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근원’을 ‘일(一, 하나)’이라 하고 이 ‘하나(一)’의 세 가지 다른 모습, 삼원三元을 ‘천․인․지 天·人·地’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원 중 ‘인人’차원이 주체가 되어 ‘천天’차원과 ‘지地’차원을 아우르며 창조와 조화를 이루어 나갑니다.
마고신화에서는 ‘인’차원, 근원의 에너지인 마고가 ‘천’차원인 허달성과 ‘지’차원인 실달성을 아우르며 창조와 조화를 이루어가는 주체임은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천․인․지 삼원은 또 광음파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천’은 빛光, ‘인’은 소리音, ‘지’는 파동波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광․음․파 중에는 소리(音)가 조화의 중심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음’을 중심으로 마고신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마고는 궁희와 소희를 낳아 5음7조를 맡깁니다. 그래도 만물은 조화롭게 안정되지 못합니다. 그러자 마고는 궁희와 소희에게 4천녀와 4천인을 낳게 하고 4천녀에게는 ‘여呂’를, 4천인에게는 ‘율律’을 맡깁니다. 합하면 율려가 되는데 율려는 우주의 질서, 법칙이자 리듬입니다. ‘음’은 율려를 타고 퍼져나가며 세상의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부도지가 보여주는 첫 장면에는 성 중의 사방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관管을 쌓아놓고 음을 만들고 있습니다. 네 천인이 만물의 본음인 기氣․화火․수水․토土를 나누어 관장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본음을 맡아서 다스리며 조화와 안정을 위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어났다가 없어지며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네 천인과 네 천녀가 결혼하여 지상에 처음으로 인류의 시조(人祖)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자손이 일만 이천에 이르러 땅 위에서 본음本音을 나누어 관리하며 하늘의 음을 땅에서 제대로 펼치니, 이때에야 비로소 천지와 천지간의 만물이 완전한 조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훗날 지소씨의 잘못으로 이 모든 조화로움이 깨지고 드디어는 모두가 성을 나가게 됩니다. 제일 어른인 황궁씨는 춥고 험한 천산주로 권속을 이끌고 나가고 많은 세월이 흐릅니다. 황궁씨는 무리에게 열심히 천지의 도를 닦고 실천하라고 이르고 천산에 들어가 돌이 되어 조음調音을 울립니다. 그가 울려내는 음의 조화로운 파장은 인간 세상의 어리석음을 없애고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도록 하였습니다.
▲ 처음에는 햇볕만이 내려쪼일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려呂의 음音만이 하늘에서 들려오니(선도사서 부도지 2장)<제목 '천지인 창조'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이상에서 보신 바와 같이 마고신화에서 ‘음’은 천지와 천지간에 있는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하나로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조화를 이루기 위한 작업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음’을 통해서 하지만, 이 ‘음’은 말이 아닙니다. ‘음’은 말을 넘어서는 소통 방법입니다. 우리 가슴에 바로 와 닿는, 언어 이전의 언어이며 언어를 넘어선 언어입니다.
우리는 매일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이 우리를 얼마만큼 표현해 줄 수 있을까요?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됨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의 한계를 압니다. 우리는 말로 소통을 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 오해도 많이 낳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에는 인종과 국적이 있습니다. 소리(音)는 인종과 국적을 뛰어 넘습니다. 지금 K-POP이 뻗어나가 전 세계적으로 팬을 끌어 모으고 있는데요. 그들이 우리말을 알아들어 우리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K-POP을 좋아하다보니 우리말과 글을 배우게 된 이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수 싸이의 세계적인 히트곡 ‘강남스타일’의 가사는 별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21억 뷰를 넘겨 유튜브 조회수 신기록을 세우며 국경에 관계없이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 되어 신명나게 말춤을 추게 만들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말춤을 추며 땅을 굴린 덕에 지구의 대 지각변동을 피해갔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까지 있었지요.
‘음’은 이렇게 관념을 넘어서 마음의 벽을 허물고 다른 사람, 다른 나라 사람, 다른 피부의 사람과도 공감하게 하고 율려로 우리가 하나임도 느끼게 해줍니다. 말과 글처럼 머리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 ‘음’입니다. 이렇듯 소리는 마음으로 바로 전달되어 우리를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덴신화의 신은 말을 많이 합니다. 우주를 창조하는 것부터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 것까지 ‘말씀’으로써 합니다. 반면, 마고신화의 마고는 말이 없습니다.
선도의 경전《삼일신고》중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인 <신훈神訓>에는 언어나 생각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다고 해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성기원도聲氣願禱 절친견絶親見). 다시 말해 하느님은 아무리 열심히 애써도 내 인식의 틀인 말과 생각으로는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의 말로 ‘말씀’을 내렸다고 해서 그 인간의 말로 된 ‘말씀’을 너무 절대시한다면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를 ‘말’ 속에 가두어 우리 인간의 인식의 틀 안에 구겨 넣는 건 아닐는지요?
▲ 김윤숙 기고가/ 국민인성교육 강사, 찬란한 우리 역사이야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