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교육 리서치] 우리는 변화의 방향 혹은 목적지를 알고 있는가?

[뇌교육 리서치] 우리는 변화의 방향 혹은 목적지를 알고 있는가?

생명과학,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기술에 관한 질문들

브레인 110호
2025년 05월 09일 (금)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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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 환경위기는 지금 우리에게 근원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도전에 직면한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뇌 속이다. 
이 같은 본질적 과제를 중심에 두고, 그 답을 찾는 데 뇌교육이 어떤 효용이 있는지를 알아가고자 한다. 
 

▲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연재 기사]

1편 : 왜 지금 우리는 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가 (클릭) 
2편 : 삶에 의미와 밀도를 부여하는 방법_뇌 감각 깨우기 (클릭) 
3편 : 두뇌를 더 민활하고 유연하게 만드는 방법_뇌 유연화하기 (클릭)
4편 : 뇌의 기본 모드를 긍정으로 리셋하기_뇌 정화하기 (클릭)
5편 : 생각, 느낌, 행동이 일치할 때 발현하는 힘_뇌 통합하기 (클릭)
6편 : 잠재력 활용을 위한 4가지 전략_뇌 주인되기 (클릭)
7편 : 우리는 변화의 방향 혹은 목적지를 알고 있는가?

 

▲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변화에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인공지능 시대에 뇌교육의 의미를 다룬 첫 번째 글로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이 2024년 3월 이었으니,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당시 테크 분야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가 인공지능이었는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때보다 지금 인공지능 이슈가 덜 뜨겁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눈에 띄는 기술의 진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 변화를 일시적 충격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년간 테크 분야의 변화는 오히려 더 빨라졌고, 인공지능 외에도 양자컴퓨터와 같이 앞으로 우리 삶에 인공지능 이상의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적 발전도 있었다. 이러한 어지러울 정도의 기술적 발전과 변화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은 대체로 몇 가지로 나뉘는 듯하다. 이 변화를 앞에서 끌고 나가는 힘을 가진 것은 사실 소수의 빅테크들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변화를 수용하면서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수용의 방식과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보고 투자도 하고 학습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따라간다.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은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이 밖의 사람들은 방향을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조금씩 익숙해지는 중이다.

우리는 이 변화의 방향 혹은 목적지를 알고 있는가?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이 같은 질문들이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이다. 변화를 이끄는 기술 중에서 앞으로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생명과학,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질문을 던지고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불멸은 축복인가?

기술적 발전을 통해 인류의 삶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많은 예측들이 있다. 아마도 그 가운데 가장 대담한 예측 한 가지를 고른다면 ‘불멸(Immortality)’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명가이고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웨일Ray Kurzweil은 인류가 2030년에 불멸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이 단백질 연구를 위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알파 폴드를 개발한 구글의 딥마인드 대표 데미스 하바비스와 존 점퍼에게 수여된 사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명과학에 인공지능이 사용되면서 인류가 생명의 비밀을 발견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유전자 복제와 가공 기술, 신체 일부를 인공물로 대체하는 로봇 기술, 뉴런의 연결망 전체를 디지털화하고 뇌를 컴퓨터와 연결하는 브레인 맵핑이나 뉴럴링크 기술, 내 생각과 기억을 데이터로 해서 디지털 자아를 만드는 기술 등이 모두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기술을 연구할 수는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가져올 변화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 보고, 과연 우리가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성찰해 보는 것이다.


불멸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불멸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내가 내 몸의 일부를 잃어버리면 나는 덜 나인가? 몸을 기계로 대체한다면, 어디까지 대체했을 때 나는 여전히 나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상상해 보고 답을 해보면, 내가 뇌를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여전히 나라는 정체감을 유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뇌 자체가 아니라 뇌 속의 자의식, 생각, 기억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만약 당신이 치매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뇌 속의 정보들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때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것이 시사해 주는 바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정보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인지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정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한다면 이미 개발 되고 있는 테크놀로지인 Personalized AI를 이용해 아바타로 만들어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나의 몸에서 의식을 형성하고 생명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던 에너지는 원래 불멸이다. 

이를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해 훨씬 자유롭고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나의 몸이 내가 아니라, 마치 내가 사용하는 자동차와 같이 나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특정한 형태로 한정될 필요도 없고, 필요에 따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몸과의 동일시를 멈추고 본질의 영원성을 받아들이면 죽음에 대해서도 매우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무지와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는 운명적인 끝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변화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의식의 변화이고 영적인 자각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는 무한정한 육체적 생명의 연장은 감옥처럼 여겨질 것이다. 내면으로부터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필요한 목적이 없이 단지 육체적인 생명을 연장하는 것 자체에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2.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위협인가?

불멸(Immortality) 만큼이나 대담한 또 하나의 예측은 특이점(Singularity)일 것이다. 특이점은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 능력의 총합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역시 불멸에 대한 예측과 마찬가지로 레이 커즈웨일에 의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불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특이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인공지능 분야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고, 2045년이 아니라 앞으로 5~6년 안에 그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예견한다.

아마도 이러한 폭발적인 인공지능의 발전과 관련해 가장 우려되는 가능성은 인공지능이 자율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인공지능은 제한적인 범위에서 자율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을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다. 현재 인공지능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능력 중 많은 것들이 의도된 프로그래밍의 결과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등장한 능력들(emergent properties)인데, 마찬가지로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갖게 될 수 있다.

인지, 기억, 계산, 추론, 예측 등 인간의 뇌가 수행하는 많은 지적인 능력들에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평균적인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이러한 능력들을 더 높여서 인공지능과 경쟁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증기기관이 나오고 내연기관이 나와서 기차와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달구지나 마차로 그 속도를 따라잡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어 보인다.
 

인간은 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은 못 하는 것들

이러한 예견되는 변화에 대해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응은 첫째, 인간의 고유한 능력과 특성이 무엇인지를 찾고 개발하는 것이고, 둘째, 인간의 지능과 인공지능이 어떻게 융화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인간은 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은 못 하는 것 중 하나는 명상이다. 필자가 어느 날 인공지능에게 이에 관한 질문을 해보았다. “언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을 때,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 혹은 어떤 상태가 되니?” 현재 사용되는 모든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언어, 텍스트 중심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 그 데이터가 사운드나 이미지일지라도 모두 의미가 부여된 텍스트, 곧 언어로 처리된다. 이 질문에 대한 인공지능의 대답은 ‘비활성 상태가 된다’였다. 마치 컴퓨터가 슬립 모드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은 내면적인 언어의 사용이다. 인간의 뇌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명료하게 깨어 있는 활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언어가 사용되지 않을 때 비활성 상태가 된다. 브레인 이미징 기술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숙련된 명상가들의 경우 명상 상태에서 전두엽이 더욱 활성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류 역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인 가르침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책을 읽고 있거나 강의를 듣고 있거나 토론을 하는 중이 아니라, 모두 뇌가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나온 것들이다. 

인공지능이 못 하는 또 하나는 ‘호기심’이다. 알고자 하고, 궁금하게 여기고, 탐구하고,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나중에 인공지능이 이러한 특성을 갖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현재는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도 질문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호기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열린 마음을 유지하고, 궁금하게 여기고, 진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이 가진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능력이다. 사람은 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이 못 하는 또 다른 하나는 ‘모른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모르겠다고 답하기를 매우 꺼린다. 그래서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흔히 인공지능의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에서 보는 것처럼, 없는 정보를 만들어서라도 답을 한다. 

‘모른다’라고 답하는 마음속에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정직함과 겸손함이 있고, ‘미지의 것’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 우리는 앎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삶의 진정한 흥미로움과 우주의 신비는 ‘미지’ 속에 있다. 만약 앞으로 자기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면, 우리는 삶을 지속할 이유와 동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아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고, 존재 이유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인공지능과 경쟁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모름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미지’의 가치와 축복을 감사히 여기면, 우리는 그것이 큰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식과 정보에 집착하고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마음과, 모름을 편안히 여기고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 중 어떤 마음이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잘 적응하고, 미지의 환경에서 길을 더 잘 찾겠는가?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은 ‘긍정적인 정보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트레이닝하는 정보는 우리가 생산해 왔고 지금도 생산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많은 정보가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정보를 만든 동기와 목적은 인간이 제공하고, 그 속에 인간 각자의 성격과 취향과 가치 기준들이 녹아들어 간다. 프롬프트의 말투를 포함해 우리가 인공지능과 소통하는 방식도 그러한 정보의 일부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

인공지능이 선인가 악인가?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위협인가 조력자인가? 이 질문은 사실 인류가 선인가 악인가, 인류는 서로에게 위협인가 조력자인가와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을 트레이닝하는 정보들은 우리 마음의 산물이다. 인공지능은 정확히 인류만큼 선하고, 인류만큼 악하다. 

인공 지능 기술이 등장한 초기에 어떤 인공지능 전문가가 한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이 악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마치 아주 똑똑한 아기를 둔 부모처럼 행동하라”고 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이 정보의 원천으로서 역할하는 한 이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제안을 한데 모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편안히 인정하고, 이를 한계나 장애가 아니라 선물이자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유지하고 좋은 질문을 던지며, 명상 속에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모두를 위한 선한 사람이 돼라.”
테크놀로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쩌면 진부하다고 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이것이 우리가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키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3. 양자컴퓨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몇 개월 전에 구글에서 개발한 양자칩 ‘윌로우’를 사용한 양자컴퓨터가 일반적인 슈퍼컴퓨터로 1025년이 걸릴 계산을 단 5분 만에 완료해서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양자컴퓨터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양자역학의 중첩과 얽힘이라는 특성을 컴퓨터에 적용함으로써 갖게 된다.

양자역학은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인류가 가진 최선의 설명이다. 양자역학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전자와 같은 미립자 수준에서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파동은 관측될 때 입자로 현상한다. 중요한 것은, 파동이 ‘변해서’ 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중성이다. 

이때 파동의 의미는 파도나 바람처럼 입자가 진동하면서 만들어 내는 움직임이 아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파동의 의미는 입자가 관측될 확률의 파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파동은 매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학적 파동이다. 

각 파동은 서로 다른 확률을 의미하지만, 입자는 그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서로 다른 확률(가능성)을 갖는 여러 가지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관측하면 그중 한 곳에서만 입자로 드러난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역학의 이러한 원리를 계산기에 적용한 것이다. 기존의 계산기는 이진법과 순차적 연산에 의존한다. 모든 정보는 0 또는 1 중 어느 하나로만 표현되고, 엄격한 순차적 논리 규칙을 따라 처리된다. 하지만 우리가 과학을 통해 연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자연은 이처럼 이진법적이지 않고, 순차적 논리를 따르지도 않는다. 

양자컴퓨터는 기존의 컴퓨터보다 계산을 더 빨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역학의 중첩의 원리를 활용하기 때문에 기존의 이진법 컴퓨터와 달리 0 또는 1뿐 아니라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허용하고, 이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병렬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양자컴퓨터는 계산을 더 빨리해서가 아니라, 이분법적이지 않고 순차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존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차이가 10의 25제곱 년과 5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의 차이를 만든다. 
 

삶에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란 없다

전통적인 컴퓨터와 양자컴퓨터의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양자컴퓨터에서 동시에 다루어지는 0과 1의 차이는 1-0=1이 아니다. 그것은 유와 무이고, 생과 사이고, 색과 공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이 우주 전체가 이러한 모순의 공존 위에서 운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1와 0보다, 유와 무보다 더 큰 모순이 있을 수 있는가? 우주가 이와 같은 모순의 공존 위에서 굴러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라고 보이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계일 뿐이다. 

예를 들어, 0과 1을 모순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 상황을 보면 답이 없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키고 망하게 하려는 경쟁의 끝이 무엇이겠는가? 무슨 논리로 상대가 설득이 되겠는가? 

이러한 갈등에 대한 답은 ‘0과 1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될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양자역학적 사고, 퀀텀 마인드이다. 삶에서 갈등에 부딪힐 때, 모순으로 보이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를 묻지 말고 양쪽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라. 이분법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통찰,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

지금까지 이 글에서 다룬 세 가지 기술(생명과학,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외에도 우리 삶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킬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수없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응하고 활용하며 변화를 끌어나가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마인드와 자세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도구와 기술이 나오고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사람들이 모두 기술자이거나 발명가이거나 과학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개척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모두 과학 기술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과 선한 의도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모두에게 유익하게 할 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아마도 ‘미래의 인류’보다는 ‘인류의 미래’가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미래의 인류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와 같은 모습, 현재와 같은 몸과 마음으로 미래를 살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하지만, 아마도 우리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변화는 그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 미래는 있겠지만, 그것이 꼭 현재와 같은 인류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고,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도 없는 듯하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인류가 창조한 문명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테크놀로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인류가 혹은 인류의 본질이나 속성이 앞으로도 오랜 기간 존속한다면, 나는 인류의 변화가 우리만의 스토리가 아니라 이 우주 전체의 모든 지성적인 존재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아름답고 위대한 성장의 스토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나무에서 내려온 원숭이의 한 무리가 길고 험난한 도전을 넘으며 변화하여,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는 지혜롭고 선한 창조주가 되었다는 경이로운 스토리.


글_스티브 김 IBREA Foundation 이사. 《공생의 기술》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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