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6편] 낳아 창조하는 마고와 가르며 창조하는 엘로힘

[기고-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6편] 낳아 창조하는 마고와 가르며 창조하는 엘로힘

 5편까지의 글에서 ‘닮은 듯 다른 두 창세이야기’ 칼럼을 쓰게 된 동기와 마고신화와 에덴신화의 내용, 그리고 두 신화가 들어있는 책과 저자에 대해 썼습니다. 이제 두 신화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오늘은 두 신화에서 신神은 어떤 방식으로 천지를 창조하였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낳아 창조하는 신’과 ‘가르며 창조하는 신’의 이야기입니다.

▲ 마고와 두 딸 궁희, 소희가 우주의 안정을 위해 활약하는 모습.<제목 '궁희와 소희'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마고신화의 마고는 낳음으로 창조를 시작합니다. 배우자 없이 궁희와 소희, 두 딸을 낳아 그들에게 5음7조를 맡기고, 궁희와 소희 역시 홀로 4천녀와 4천인을 낳습니다. 이 과정은 기氣에너지가 분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고는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합니다. 

‘여’는 현상계가 형성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기초 작업이자 정신적 작용입니다. ‘율’은 ‘여’의 결과 드러나게 되는 현상계 모습이자 보이는 물질적인 작용입니다. 법칙과 리듬, 질서인 ‘율려’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4천녀와 4천인이 결혼하여 인류의 시조(인조人祖)들이 태어납니다. 일만이천에 이른 인조들이 하늘의 뜻을 땅 위에 실천하여 하늘과 땅을 잇는 조화의 주체 역할을 해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천지는 완전한 조화에 이르고 안정되게 됩니다. 마고는 이렇게 혼자서 창조를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나온 존재들을 창조 작업에 동참시키며, 그들과 함께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 궁희와 소희가 낳은 네 천인이 각각 창조과정에서 역할을 하는 모습.<제목: 네 천인의 역할 /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 선도문화진흥회>.

 마고신화가 실려 있는 <부도지>는 선도사서仙道史書니만큼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전통인 선도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선도의 핵심경전인 《천부경》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 모든 존재가 그것에서 나와서 그것으로 돌아가는 하나’, 존재의 근원을 ‘일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세 가지 다른 차원인 천天(정보, 의식)‧ 지地(질료)․ 인人(기에너지) 삼원三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는 개체가 아니라 ‘일一’의 세 가지 다른 모습입니다.

 <부도지>에서는 이 삼원이 허달성虛達城(天), 실달성實達城(地), 마고성麻姑城(人)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차원 마고성의 마고(기에너지)가 주체가 되어 ‘천’차원 허달성과 ‘지’차원 실달성을 아우르며 창조와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고는 창조의 여신으로 의인화되어 있지만 인격신이 아닙니다.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에너지, 근원의 에너지입니다. 마고는 율려를 타고 뭉쳤다 흩어지며 모든 현상과 사물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입니다.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에너지입니다. 마고는 우리 생명 속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신은 희로(喜怒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 없다고 나옵니다. 마고는 얼핏 보기에 냉정하고 무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 같은 사사로운 사랑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마고는 우주의 어느 작은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크나큰 사랑으로 그 모두를 품습니다. 

 우주만물은 기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기에너지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이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주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의 차원에서 볼 때, 만물은 하나이며, 가름이 없고, 벽이 없고 경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고 안에 있으며, 마고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 <창세기> 중 천지창조이야기.

 이제 에덴신화로 넘어 가겠습니다. 에덴의 첫 이야기- 6일 동안의 천지창조이야기의 주인공 엘로힘은 말씀으로 명령 내려 분리하고 가르며 혼자서 창조를 해 나갑니다.

창조의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을 나누고, 둘째 날에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습니다. 셋째 날에 육지와 바다를 가르고, 넷째 날에 하늘에 큰 빛과 작은 빛을 만들어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습니다.

 다섯째 날에 바다의 물고기들과 하늘의 새들을 지어냅니다. 여섯째 날, 땅 위의 온갖 동물들을 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창조되어진 것들을 다스리기 위해 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냅니다.

이렇게 인간은 신을 대신해서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여라. 모든 짐승을 부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밝음과 어둠을 갈라 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였다”(《구약성서》<창세기>1장18절)는 구절에서 보듯이 엘로힘은 나누고 가르면서 창조를 하고 질서를 세워 갑니다. 그 질서는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함입니다. 신은 명령하고 인간은 순종합니다. 신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세상을 지배합니다.

 이 신이 창조한 것들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엘로힘은 초월적인 존재로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밖에서 이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창조주가 만든 세상은 단절되고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또, 인간 對 인간이 다스려야 될 대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정복의 대상이며, 동물은 인간이 부릴 대상이지 더불어 살아갈 대상이 아닙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분리되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엘로힘의 명령은 지금 서구세계에서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환경의 파괴로 위기에 몰린 지구에 대한 책임이 이 자연관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왜냐면 지금의 물질문명을 주도해온 서구문명은 이 창조신화의 세계관, 자연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응하여 이 구절이 자연에 대한 파괴와 수탈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잘 관리하라는 의미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자연 위에 인간을 두는, 인간 중심의 사고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신이 이렇게 가르고 나눈 것이 지구 전체 인구의 반을 넘는 사람들이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서로 갈라져 끊임없이 싸우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가르고 나눈 작업의 끝에 지금의 지구가 서 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괴로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늘 가만히 있기만 했던 땅이 키를 까부는 것처럼 흔들릴 때 인간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지구가 살아야 그 위의 우리들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실감이 났습니다.

 지구와 우리는 마고에게서 나온 하나입니다. 마고는 가르지 않습니다. 에덴신화와 같이 나와 너를 분리하고 ‘너’를 지배하는 사유로는 더 이상 지구와 인류는 존속될 수 없다고 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에서 나온 하나’라 여기며  조화롭게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마고신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지속이 불가능해진 현대문명을 향해 마고신화는 인간 세상도, 지구도,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김윤숙 기고가/ 국민인성교육 강사, 찬란한 우리 역사이야기 강사.




▲ 마고와 두 딸 궁희‧소희, 그리고 그 자손 4천녀 4천인의 활약으로 지구가 안정된 모습.<제목: 지구의 안정/출처: 그림으로 보는 우리역사 이야기/선도문화진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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