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프랑켄슈타인>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제공]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름답다'다.
한 편의 그림처럼 스크린에서 눈을 한순간도 뗄 수 없을 만큼 미장센이 아름다웠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어둡지만 컬러풀하다. 이 두 개의 단어는 분명 상반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단번에 이해할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붉은 드레스, 동생의 약혼녀 엘리자베스의 등장하는 장면은 주변에 비해 화사하고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어두운 갈색 머리와 동생 윌리엄의 금발 역시 컬러의 대비로 어둠과 밝음을 드러낸다.
이 아름다운 색채 대비는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순수와 폭력, 창조와 파괴의 대립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영화에서 대립과 갈등을 과감한 색감 대비로 표현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순수한 피조물과 폭력적인 세상
이 영화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가진 거장이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동화 같은 스토리와 기이한 외모의 '크리처(Creature)'가 등장한다. 크리처는 창조된 생명체를 뜻하는 단어로, 몬스터(Monster)가 흉측한 괴물을 의미한다면 크리처는 창조된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 델 토로 감독의 영화는 판타지 같지만 동시에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개성 강한 감독이 누구나 다 아는 '프랑켄슈타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통적으로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속 크리처들은 한없이 순수하고 어떤 의도도 없는 반면, 세상은 오히려 폭력적이고 크리처를 위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사형수와 전쟁 폐허 속 시체들을 모아 크리처를 만든다. 상처 입은 육신들의 조각으로 탄생한 크리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등장인물 중 가장 순수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낯선 존재를 경계한다. 우리 뇌의 편도체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위험한다고 판단하는데, 반응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기질적으로 불안·회피 성향이 높은 사람은 낯선 얼굴에 대한 편도체 반응이 더 오래 지속되어, 익숙해진 후에도 여전히 위협적으로 반응한다. 반대로 새로움 추구 성향이 높은 사람은 위험 예측 관련 영역의 연결 패턴이 달라, 낯선 상황을 위협보다는 도전·기회로 인식하는 것으로 연구 결과 밝혀졌다.
이런 본능적 반응은 영화 속 사람들이 크리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짐승(Beast)이라 부르며 증오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과 평생 순수하고 경이로운 존재를 찾아 헤맨 엘리자베스는 크리처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감독은 우리에게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를 통해 낯선 것에 대한 경계 짓기, 혐오, 불완전함 너머에는 순수함과 고귀한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을 맡은 배우 오스카 아이작 [사진=넷플릭스 제공]
증오의 대물림을 끊는 용서
영화는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된다. 빅터가 죽음에 집착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크리처를 학대하는 장면에서는 빅터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태초의 인간은 신이 만들었지만, 그 이후의 인간들은 인간이 만들었다. 빅터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세상의 많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애증의 관계가 된다. 빅터와 크리처의 관계는 빅터의 아버지와 빅터의 관계처럼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팽팽하게 맞선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 관계는 완전히 전복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마침내 그의 피조물에게 "내 아들아(My Son)"라 부르며 용서를 구한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대물림되지 않고 새롭게 전환된다. 이 장면을 보면서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든지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 영화 <프랑켄슈타인> [사진=넷플릭스 제공]
죽음을 원한 크리처, 삶을 말하는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정복하고 불사(不死)를 원했지만, 그가 만든 크리처는 죽음을 간절히 원했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평생 죽음에 집착했던 프랑켄슈타인은 막상 자신이 창조주가 된 이후로는 공허함을 느낀다.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크리처는 자신이 왜 존재하게 됐는지 알게 되면서 엄청난 분노에 휩싸여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간다. 영원한 고통 속에 살아야 함을 알게 되면서 삶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크리처에게 프랑켄슈타인은 말한다.
"스스로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여.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동안 네게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이야."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아름다운 미장센과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대사, 우아한 음악으로 러닝 타임 150분 동안 단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담아 새롭게 표현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 전은애 수석기자 hspmaker@gmail.com
참고문헌
•Ying Wang, Ying Liu al. (2015) Novelty seeking is related to individual risk preference and brain activation associated with risk prediction during decision making. Nature 11 June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