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120년…노예로 살지 않겠다!

을미사변 120년…노예로 살지 않겠다!

국가보훈처, 2015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명 선정

▲ 2015년 이달의 독립운동가이다. 윗줄 왼쪽부터 1월 황상규, 2월 이수흥, 3월 박인호, 4월 조지 루이스 쇼, 5월 안경신, 6월 류인식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7월 송헌주, 8월 연기우, 9월 이준식, 10월 이탁, 11월 이설, 12월 문창범(국가보훈처 제공)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50주년이 된다. 그러나 120년 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 낭인의 칼에 시해된 해이기도 하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한 것으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부른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 정책으로 한일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당시 을미사변 이후 전국적인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라고 강조한 독립운동가 홍암 나철의 말은 의병정신이 곧 애국심이었다. 을미사변 120년을 맞아 독립정신은 오늘날에도 절실하다. 국가보훈처에서 2015년에 선정한 독립운동가 12명을 만나기 전에 무명의 조선 의병을 만나본다.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 종군기자 F.A.맥켄지(Frederick Arthur Mackenzie, 1869~1931)는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조선 의병이 일본 군인과 싸우는 현장에 있었다. 그는 한 의병에게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했다.(F.A.맥켄지,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 1920년) 나라가 빼앗겨도 몸이 짓밟혀도 의병정신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2명 독립운동가 중에서 11월 이설(李楔, 1850〜1906)에 주목한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충남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사늑약에 체결되자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어 5월의 인물로 선정된 여성독립운동가 안경신(1888〜미상)이다. 당시 23살이었던 그녀는 임신부 몸으로 평남도청(8월 3일) 폭탄을 던진 것에 이어 다른 동지들과 신의주 철도호텔(8월 5일), 의천경찰서(9월 1일)에 폭탄을 던졌다.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보다 12년 앞선 일이었다. 이밖에 1월 의열단을 조직한 황상규 선생, 2월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을 지휘한 이수흥 선생, 3월 반외세․자주독립의 만세운동을 이끈 천도교주 박인호 선생, 4월 이륭양행을 세워 독립운동을 지원한 조지 루이스쇼, 6월 교육구국운동을 벌인 혁신유림 류인식 선생, 7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한 송헌주 선생, 8월 대한제국군 출신 의병장 연기우 선생, 9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이준식 선생, 10월 독립군과 임시정부에서 지도자로 활약한 이탁 선생, 12월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선생 등이 있다.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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