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과 정릉의 주인은 누구?

선릉과 정릉의 주인은 누구?

[김양의 가을 산책 - 2] 조선왕조의 릉, 선릉과 정릉 문화 산책 2

조선 왕조의 무덤은 총 42기다. 이중 북한 개성에 자리한 태조왕비 신의왕후 제릉과 정종 후릉 2기를 제외한 40기는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있다. 2009년 이 40기 능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능의 주인은 누구신가요? (능의 세계에도 커플과 솔로는 존재한다.)

사적 제199호인 선릉의 주인공은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다. 사후 묘호가 성종으로 정해진 이유는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는 중종의 모친이다. 첫 번째 비는 공혜왕후로 1474년 아들 없이 죽고 1476년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으나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1479년 폐위된다. 숙의 윤씨가 바로 연산군의 생모다. 이어 1480년 왕비로 책봉된 것이 정현왕후다.


▲ 선릉의 모습. 선릉과 정현왕후의 능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다. 하지만 정릉이 있는 곳은 지대가 낮아 당시 장마철이면 침수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하나의 능에 어떻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느냐고? 왕과 왕후 능이 하나의 정자각 뒤로 각기 다른 언덕에 별도 봉분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다. 선릉 자리는 원래 성종의 숙조부였던 광평대군(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묏자리였으나, 현재의 수서로 광평대군의 묘를 옮기고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은 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킨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본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제1계비인 장경왕후 희릉 오른쪽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1562년 지금의 자리로 천릉했다. 겉으로는 풍수가 나쁘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본인이 사후 왕의 곁에 묻히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새로 옮긴 현재의 능 자리는 지대가 낮아 장마철이면 침수를 면치 못할 정도로 지리상 좋은 곳이 아니었다.


▲ 선릉과 정릉의 한 구역.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다.

하지만 문정왕후도 결국, 중종 곁에서 잠들지 못하고 태릉에 홀로 안장된다. 중종은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3명의 비가 있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하고도 합장릉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있다. 

왜란 속, 아픈 역사의 흔적

선릉과 정릉에는 역사의 아픈 흔적이 새겨져 있다. 195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들이 도굴˙파괴한 것이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4월 24일 경기도 관찰사 문신 성영(成泳)의 보고에 관련 내용이 올라온 것으로 보아 1953년 4월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 선릉 앞을 지키고 있는 석양과 문인과 무인 석인들. 석인도 왜란에서는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

이때, 성영의 보고를 보면 선릉의 광중(壙中)은 이미 비어 도굴당한 것으로 보인다. 선릉과 인접해 있던 정릉 또한 접근하기 쉬웠기 때문이리라. 성영이 당시 올린 보고를 보면 “옷은 없어지고 옥체(玉體)가 광중에 놓여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중종의 시신이 있었던 것처럼 알려졌었다. 하지만 원로대신들과 종친, 환관, 궁녀들까지 동원하여 확인한 결과 중종의 시신이 아닌 것으로 의견이 모여 의대(衣襨)만 묻기로 하였다.


▲ 선정릉 재실 들어가는 문. 이곳에서 기제사에 쓰는 음식 등을 준비하곤 했다.

이때, 정릉은 희릉 옆으로 다시 한 번 갈 뻔했다. 개장도감이 설치되고 대신들은 정릉을 다시 옛 자리로 옮기기를 청하였으나, 다시 의견을 조율하여 옥체가 있었던 지금의 자리에 봉안할 것을 선조에게 아뢰었고 선조는 이를 승낙했다.


▲ 재실 앞 100년 묵은 은행나무가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은행잎이 인근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선정릉 숲은 현재 서울 강남 도심에 있다 보니 다른 능보다 많이 훼손되어 있다.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던 금천교나 재실 서쪽에 있던 연지도 없어졌다. 아마도 강남 인근을 개발하던 중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해설을 하던 어르신 말씀으로는 60년대에만 해도 속세와 신성한 영역을 차단하던 물길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그 부분을 개복하고 도로를 놓았다고.

선릉은 역사경관림과 동원이강형에서 나타나는 잔디면의 ♡형 공간형태가 성종과 정현왕후 능침 사이를 수림으로 가렸기 때문에 동원이강형의 원형을 상실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이후 일부 농지개간과 자연 식생 번식으로 원형을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훼손되기는 숲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송림 역사경관림과 천연림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정릉 왼편 계곡은 근래에 복토를 하여 지반이 높아졌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전답으로 활동하다가 최근 역사경관림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글. 김효정 기자 manacula@brainworld.com
도움.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Ⅲ》,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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