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인과 국가의 창조성이 열매 맺는 배경

[칼럼] 개인과 국가의 창조성이 열매 맺는 배경

고영훈의 뇌과학과 인문학 - 07

지금까지의 칼럼들은 인간의 마음과 두뇌와 몸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먹는 것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제는 사람의 몸을 공동체나 국가로 확장하여 집단 전체의 창의성이 꽃피우는 조건에 대해서도 뇌과학적인 반응과 연결하여 큰 그림을 설명해보겠다.

개개인의 창조성을 확장하게 시킴으로써 사회 전체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독일의 예술가 ‘요셉 보이스’는 예술, 교육, 정치, 환경운동을 함께 하며 살았다. 그는 ‘마르셀 뒤샹’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대부이다.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고 했는데 모든 인간의 창조력을 인정하면서 ‘사회조각(Social Sculpure)’이라는 개념을 설파했다. ‘사회조각’은 사회 전체를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든다는 개념이지만 개인으로서의 시민의 가슴에 창조성과 역동성을 주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집단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바탕이 개인의 창조성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복지와 평생교육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복합적으로 건강한 구조 속에서 ‘사회조각’이 가능하다.

‘사회조각’과 개인의 창조성을 공든 탑 피라미드로 보자면 기저에는 회복탄력성이 가장 중요하다. 회복탄력성은 주로 태교에서 3세까지 만들어지는 오피오이드계와 관련이 있다. 좌절과 위기 때에 엔돌핀을 적절히 분비함으로써 자신이 위험해지지는 않는다는 생존에 대한 자신감과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래서 이 회복탄력성은 국가의 복지 수준과 연결된다. 실업의 위기와 주거의 불안정 건강의 위협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는가가 국가의 회복탄력성이 된다. 회복탄력성이 자기결정성과 같은 네모에 함께 있는 이유는 개인이 미래를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을 때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다.

복지의 수준이 낮아서 공무원이 되지 못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면 먹고사는 것이 불안할 때에는 개인적인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다. 그래서 경쟁이 심한 레드오션인 좁은 길로 가야만 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는 국가의 복지수준이 낮을수록 더욱 심해진다.

선택권이 있다는 말은 서로 가치는 비슷하지만 성격이 다른 것들을 고를 때에나 쓸 수 있다. 옷가게에서 비슷한 가격대에 다양한 색과 디자인이 있는 상황에서 자기결정성이 발현된다. 명문대와 대기업에 가지 않아도 색다른 삶을 생존과 자존의 위협 없이 누릴 수 있을 때에만 직업 선택의 자기결정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이 갖추어진 다음에는 자기주도성과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 자기주도성은 자신이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교육에서의 자기주도성은 개별 맞춤교육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한 교실에서 교사의 수업을 10%의 학생만 따라간다면 90%는 그 교실에 있는 이유가 자기주도적일 수 없다.

자기주도성은 도파민이라는 신경계가 잘 발달해야 형성된다. 도파민은 자기주도적인 시도에서 맛보는 성취감과 효능감에 의해서 성장하는데 난이도가 맞지 않고 흥미도 없는 수업은 학생들의 도파민신경망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

10대의 두뇌는 자기주도성을 잃게 되면 시냅스의 연결이 급속도로 끊어지므로 지능과 창의성 면에서 약골이 된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한국 공교육은 국민의 창의성과 지능을 낮추는 방식으로 제도화 되어 있다.

자기주도성과 자존감을 위한 교육 혁신은 여럿이 협동하여 공부하고 공통의 과제를 해결해보는 프로젝트 수업이 좋다. 교사중심 경쟁교육이 학생중심 협력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자기주도적인 협업 없이는 창조성의 수준이 높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의 창조성은 이기적이고 소유적인 동기에서 애타적이고 공유적인 동기로 혁신되어야만 수준이 높아진다.

교실에서의 과제를 해결하는 협동수업도 공유동기가 있어야 원활해진다. 아이디어를 공유함으로서 더 높은 창조성에 이르러서 그 열매까지 공유해야만 사회적 자본인 신뢰자본이 생긴다. 이 신뢰자본은 개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창조성은 구성원간의 신뢰자본이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된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버스의 좌석까지 백인석과 흑인석을 분리하고 백인에게 우선권을 주던 미국은 노예해방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노예해방을 완성시키려던 ‘마틴 루터 킹 2세’는 창조적 박애주의와 파괴적 이기주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자고 우리의 홍익인간의 문화를 외쳤다.

그는 21세기의 모든 것이 연결되는 사회의 신뢰자본과 동기의 혁신을 일찍 역설했다. 미술가 ‘칸딘스키’는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를 ‘or’와 ‘and’의 차이라고 말했다. 어느 한 직업을 선택하던 19세기는 종교도 이념도 어느 하나에 충성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직업도 여러 개를 갖게 되었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고 세계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요즘의 21세는 모든 것이 연결되는 ‘on’의 시대다. 따라서 다양한 발명의 아이디어들이 매쉬업(Mash-up)한 집단지성에서 나오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세상을 이롭게만 한다면 기꺼이 공개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다. ‘위키피디아’도 그런 예이다.

실리콘밸리의 인재들이 많이 참여한다는 ‘버닝맨’ 축제는 ‘오픈이노베이션’과 ‘크라우드소싱’이 오프라인에 펼쳐지는 아이디어의 축제이다. 젊은이들이 창조적 박애주의를 즐기면서 발명을 하고 그 혜택을 공유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집단지성의 창조성에 불을 지르고 있다.

여전히 미국이 지구의 문명을 리드하는 이유는 개인의 발명을 존중하는 문화와 아이디어를 공유하여 더 좋은 기술을 세상에 보급하려는 홍익인간의 문화 때문이다. 미국의 자신감은 군사기술의 개발까지 오픈하며 집단지성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 연구기관이 국방고등기획국(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다르파(DARPA)이다. 그들의 협업 시스템은 기술을 노출시켜도 누가 따라할 수 없다.

발명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노벨상의 경우에도 자신의 연구를 오픈하면서 여럿이 함께 연구를 한다. 예전과 달리 연구하고 분석할 분량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국도 건국의 이념이었던 홍익인간 정신을 발전시켜서 복지의 수준을 높이면서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경쟁교육에서 협력의 교육으로 제도와 문화를 바꿔가야만 발 빠른 선진국의 혁신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고영훈 <내 아이를 위한 두뇌사용설명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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