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filepath=BrainHealth)
‘꿈? 기억나지도 않아. 뭐, 떠오르더라도 대부분 개꿈이지. 허황되고, 불쾌하고, 추잡하기까지 한.’ 당신은 시답지 않은 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하찮고도 하찮은 ‘개꿈’이야말로, 보잘것없는 생의 이면을 비추는 찬란한 ‘그 무엇’임을 이야기하려 한다.
삼 년 전,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나 다른 사람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나만 살아남아 밥 잘 먹고 똥 잘 싸며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해간다는 죄책감과 날 버려두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에 대한 원망이 빚어낸 무의식의 작품이려니, 그렇게만 생각했다. 꿈마저 내게 고통을 주는구나, 탓했다. 반복되는 꿈은 오랫동안 꿈꾼 이의 닫힌 기억의 문을 열어 온전함으로 이끌기 위한 간절한 메시지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당신의 꿈을 타인의 직관에 저당잡히지 마라
프로이트, 아들러, 융, 현대의 뇌과학자들. 꿈에 대한 이들의 이론은 모두 유용할 뿐만 아니라 ‘꿈작업(dream work, 꿈을 통해 무의식과 소통하는 과정)’을 할 때 지침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을 공부한 전문 분석가, 치료사, 상담가 등에게 ‘자, 내 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하고 맡기기만 한다면 꿈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메시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꿈의 언어는 최초의 모국어다. 모든 인류가 공유한 공통어이기에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꿈의 언어를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의미 있고 중요한 직관이 다른 사람에게서 온다고 믿는다면 이 능력을 발현할 기회는 아예 사라진다. 내 꿈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이는 바로 ‘꿈을 꾼 나’이다.
제레미 테일러는 꿈작업에서 꿈꾼 이의 창조적인 자기통찰을 강조한다. 그는 꿈이 지닌 영성적인 가치와 사회변혁의 가능성에 주목해왔다. 나는 꿈작업에서 제레미 테일러의 조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꿈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을 설명하기보다 꿈이 지닌 창조적인 에너지를 체험 중심으로 전하고자 한다. 만약 꿈을 다루는 다양한 방식과 이론에 관심이 있다면 그 부분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겠다.
꿈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나 자신이다
한동안 이런 꿈을 꾸었다. 죽은 그 사람이 비에 젖은 채로 길에 누워 있거나, 나는 그를 알아보는데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런 꿈들을 적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꿈의 줄거리를 적는 와중에 ‘어린 딸을 버려두고,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문장을 자동 기술했다.
그 문장의 단어와 단어 사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눈물을 터뜨렸다. 아빠이고, 엄마이고, 또 하나의 나이기도 했던 한 사람과 분리되는 것이 생목숨을 끊어내는 것만큼 아픈 거로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애써 눌러온 통증이 꿈을 통해 자각되었다. 울고, 또 한동안, 아무데서나, 울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묵직한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하나의 상실은 도미노처럼 과거의 모든 상실된 기억을 건드린다. 상실 체험을 통해 내면의 분리 불안에 주목할 수 있었다. 내 곁의 단 한 사람이 떠난 것뿐인데, 나와 연결된 세상의 끈이 완전하게 단절된 느낌. 날고는 있지만 다리가 없어 땅에 착륙하면 곧 죽는다는 전설의 새처럼 늘 허공을 부유했다. 쉬어본 적 없는 날개, 그 힘겨운 날갯짓. ‘경찰이 쫓아온다.
난 도망간다. 쫓기며 달아난 곳은 아파트 꼭대기의 대형 다락방. 백여 명의 할머니들이 잠들어 있다. 나는 한 할머니 옆에 누워 이불을 푹 뒤집어쓰며 숨는다. 쫓아오던 경찰이 그 이불을 걷으려 할 찰나에, 깬다.’ 이 꿈도 기록 과정에서 ‘아하!’가 왔다.
‘경찰이 이불을 벗기면 할머니가 있겠구나. 나는 할머니구나!’ 죽을 날을 기다리며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할머니가 한둘도 아니고 집단으로 있는 모습, 그게 나였다. 어쩌면 숨 쉬는 것조차 끔찍하게 두려웠던, 버려진 그 아이가 빠른 노화를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운 좋게도 그즈음 십대 아이들을 만나 책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들도 자신을 버려진 존재로 느끼는 아이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종종 꿈에 아이들이 나타나거나 십대 시절의 내가 등장했다. ‘그땐 아팠지만, 지금은 괜찮아’ 했던 십대의 기억들이 만져졌다. 때때로 등장하는 내 안의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불안, 두려움의 정체를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뿐 아니라 꿈에 나타난 동물, 식물, 사물 등 모든 요소는 나 자신이다. 이는 제레미 테일러가 꿈작업에서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꿈에 십대 아이들이 등장했다면, 나의 십대를 떠올리며 통찰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내 꿈’으로 가져와 직관과 상상을 통해 스스로 알아차림, ‘아하!’의 과정을 거친다. ‘목을 다쳐 빨간 끈을 목에 두른 흰 진돗개가 나의 눈을 바라봤다.’ 누군가 들려준 꿈의 일부였다. 다쳐서 제대로 짖지 못하는 진돗개를 떠올리자, 솔직한 내면의 목소리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빨강은 표현의 열망 혹은 분노의 상징으로 다가왔고. 진돗개의 목을 어루만지는 상상을 하며 내 목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독선적인 상사 때문에 힘들었던 직장을 그만뒀다. 새 일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내려놓자, 내 목소리를 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찾겠다는 의지는 현실이 되었다.
모든 꿈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당신이 꿈작업을 하길 원한다면, 그런데 처음이라면, 혼자보다는 그룹으로 하길 권한다. 나를 봐도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 타인이나 사물에 투사해서 보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데 익숙하다. 꿈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울’이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왕비는 듣고 싶은 답을 이미 정해놓고 거울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나. 그런데 그 답이 백설공주라니! 인정할 수 없는 노릇일 테다. 우리도 왕비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속이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룹 작업을 통해 다양한 제안과 투사를 받는 과정에서 오히려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아하!’가 오기 쉽다.
또 모든 꿈은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기에 그룹으로 작업할 때 꿈의 전체 의미에 가까이 갈 가능성이 크다. 그룹 진행 시 꼭 전문가가 리더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리더를 할 수 있지만, 당신의 상상력을 깎아내리는 사람이라면 곤란하다. 상상력을 폄하하는 것은 인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이며 자발적인 관계 속에서 상상력을 펼치는 것,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지성이 자유로워지기 위한 절대 요소다.
때로는 누군가와 자연스레 꿈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평소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춘기 남자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배후에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엄마가 존재한다. 어느 날 아이가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데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친구들과 가상 게임을 진행하는데, 게임을 진행할 때마다 엄마의 허벅지가 잘려나갔다. 잘리고 잘려서 점점 짧아졌다. 무서웠다.
그런데 게임이 끝나니 엄마 허벅지가 다시 붙었다.’ 다소 끔찍할 수도 있는 이 꿈이 나는 무척 반가웠다. 엄마의 허벅지가 잘린 이미지는 이 아이에게 엄마와의 정신적인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자기 문제의 핵심에 접근했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꿈을 꾸고 나면 죄책감을 가진다. 이 친구 또한 그 죄책감 탓에 꿈의 말미에서 엄마의 허벅지가 다시 붙는 장면으로 전환된 것 같다. “이제 엄마와 분리되어 진짜 남자 어른으로 성장하려는 꿈이야.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아이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흔히 오해하는 꿈 중의 하나는 섹스나 죽음과 관련된 꿈이다. 꿈에서 섹스는 강력한 통합의 힘을 상징한다. 당신이 이십 대의 관능적인 남자와 섹스하는 꿈을 꾸었다면, 이십 대의 남성적인 에너지가 발현될 수 있는 잠재 에너지가 당신에게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니 부끄러워 마라. 또 꿈에서 내가 죽는다면 이전의 인격에서 새로운 인격으로의 탄생을 의미하니 이 또한 손뼉 칠 일!
꿈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를 다뤄라
한동안은 평소 내가 열등감을 느낀 인물, 혹은 재능도 풍부하고 인격적으로 닮고 싶은 인물이 꿈에 등장했다. 그 인물들은 나의 밝은 그림자였다. 꿈을 꾸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아하!’가 왔다. 그림자는 우리 자신과 통합된 부분이지만, 대부분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다.
뜻밖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하면서도 위대한 면을 발견했을 때는 오히려 저항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랬다. 자신이 아름답고 신성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의 혼란스러움. 밖으로의 투사를 거두면서 나는 내 안의 다른 모습을 만나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내 안의 두려움, 불안함, 깊은 우울을 느낀다. 그렇게 내 삶은 불혹不惑이 아니라 혹惑함, 흔들림 속에 있다. 꽃 지고 난 자리에 파릇하게 돋은 잎이 바람에 나부끼듯. 내 인생의 계절에도 한 차례 벌겋게 달아오른 꽃이 졌다. 죽은 이를 부둥켜안고 지낸 몇 년의 시간 동안 내 꿈은 나를 지켜줬고, 끊임없이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보이지 않는 신성한 에너지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꿈이 말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꿈, 그의 일부분만을 이해할 뿐. 그이는 깊디깊고, 넓디넓다.
글·곽문주 yaongstar@naver.com
도움 받은 책·《사람이 날아다니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곳》 제레미 테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