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지쳐 폭발 직전일 때 우연히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http://blog.daum.net/film-art)’을 찾았다. 감성적인 테마로 정성스럽게 가꾼 그림들의 정원. 치유의 음악이 흐르는 그림의 숲에서 몇 시간을 서성이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맑게 개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미술과 패션이 주요 테마인 그의 블로그에는 확실히 치유와 위안이 있다. 따뜻한 감성과 절절 끓는 열정이 있다. 하여 패션과 미술에 문외한인 기자, 갑자기 그의 뇌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샤넬, 미술관에 가다》, 《하하 미술관》의 저자로 기억한다. ‘샤넬’은 미술을 통해 패션의 숨은 이야기를 복원한 야심작으로, 출간되기까지 장장 7년이 걸렸다.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해 스무 번 넘게 비행기를 탔고, 관련 도서를 사 모으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하하 미술관》은 그림을 통해 영혼을 치유하는 심리 치유 에세이집이다. 엄마 새가 아기 새에게 음식을 씹어 먹여주듯 그림으로 사람들의 상처받은 내면을 다독이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패션과 미술 전문가로 안다. 스스로도 국내 패션 큐레이터 1호라고 칭하지만 정작 그에게 이 분야는 본업이 아니다.
그의 전공은 경영학이고, 현재는 유비쿼터스 시장을 개발하는 마케팅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누적 조회 수가 5백만 건이 넘는 그의 블로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글과 그림들이 올라온다. 따끈따끈한 미술 전시를 발 빠르게 감상하고 친절한 해설과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은 물론, 소설가 이외수·공지영, 팝 피아니스트 유니스 황 등의 예술가들과 교류한 시간도 가감 없이 포스팅 된다.
“패션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도 되겠다는 생각에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미술을 다루는 매체가 아주 적더군요. 포스팅 하나 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정성이 장난이 아니네요.”
직장생활에, 앞으로 낼 세 권의 책 집필에 블로그 포스팅까지, 그는 요즘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돈 되는 일도 아닌데, 그런 일을 왜 하느냐는 우문을 던지자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서.”
창조적인 뇌를 쓰는 이 남자의 방법
그가 처음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백화점 아동복 상품 기획을 하면서 온몸의 에너지를 소진해가며 일하던 시절, 문득 내가 뭐하고 사는 건가 싶어서였다. 좋아하는 일에는 미친 듯이 열중하는 성격 탓에 일에 지쳐 녹초가 되어도 글쓰기는 놓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사표를 내고 캐나다 유학을 감행했다. 도서관과 박물관을 전전하며 혼자 보기 아까운 작품을 인터넷에 올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에 관한 글과 때로는 삶에 대한 소소한 단편들을 올리며 기본기를 다졌다. 그러다 2005년,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그의 제국도 블로그로 전환했고, 네티즌의 방문이 연일 급증했다.
남들보다 두세 배는 바쁘게 살 수 있는 열정적인 에너지의 비결은 많이 움직이는 것.
“원시시대 사람들은 하루 평균 20킬로미터를 걸었대요. 우리 몸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런 환경에 적응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매일 그 정도의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는 거죠. 피곤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면 힘이 나요. 또 평소에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서 온몸의 감각을 살리려고 해요.”
몸 쓰는 걸 워낙 좋아해서 중학교 때도 공부보다 춤에 미쳐 있었다는 그는 급기야 서른한 살에 뉴질랜드에서 발레를 배웠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30분을 달려 무용센터에 가서 타이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처음엔 힘들지만 매일매일 몸의 한계를 넘어서다 보면 어느 순간 탄력을 받아 점점 몸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는 그 감각을 그는 몹시도 사랑한다.
“인간에게 호흡이라는 게 있잖아요. 숨을 쉬어서 신체의 대사 작용을 하는 것도 호흡이지만, 정서에도 호흡이 있어요. 계속 한자리에만 있으면 정서가 고여서 뇌가 활성화되지 않아요. 때로는 충격적인 것도 경험하고, 한없이 침잠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야 정서의 혈맥이 도는 것 같아요. 인터넷이 열린 창이라고요? 저는 그 말 안 믿어요. 무조건 몸을 움직여야 해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래야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몇 마디 말 속에서 뇌가 자극받아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번뜩이거든요. 책상머리에 앉아서는 세상이 안 보여요.”
그래서 그는 조만간 한강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도 할 참이다. 작업실에서 서울숲까지 7킬로미터, 퇴근해서 한강변을 따라 왕복 세 시간을 뛰고 나면 글이 더 잘 써질 것 같단다. 이렇게 매사 열정적이고 창조적인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초등학교 때 정말 공부 못했어요. 중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했을 정도라니까요. 고등학교 때도 수학은 무조건 ‘가’였고, 내신은 6등급이었죠. 다만 어릴 때부터 책은 좋아했어요. 문고판 시리즈를 통독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패션 잡지를 읽었죠.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거든요. 당시만 해도 진희경 씨 같은 분이 톱모델이었는데, 그런 누나들과 함께 작업하는 꿈을 매일 꿨어요. 결국 의상학과는 못 갔지만, 간절히 바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더라고요.”
발광發狂을 해야 아이디어가 발광發光한다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보고 나서 그가 얻은 것은 지식이 많은 것과 지혜로운 것,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은 별개라는 것. 그래서 그는 사회생활은 물론 예술 작품을 볼 때도 학벌이나 인맥을 절대 따지지 않는다. 대신 예술가의 1%의 가능성을 높이 살 줄 아는 안목, ‘심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육하는 사람들이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된다면서 노력을 굉장히 강조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1%의 영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교육이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99%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1%의 영감을 가진 사람은 점점 더 찾기 어려운 것 같아요. 1%의 영감을 가진 과학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내고, 1%의 영감을 가진 비평가가 새로운 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거죠. 사실 우리시대에 필요한 것은 99%의 교육보다 1%의 영감이에요.”
그렇다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99%의 교육 말고 자기만의 안목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1%의 영감은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어요. 결국 이 세상 모든 질서 안에 해답들이 섬처럼 떠 있는 거고, 그 섬들을 어떻게 연결해서 적절한 해답을 찾아내는가가 중요하죠. 다만 번뜩이는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뇌의 한계를 넘어서는 연습이 필요해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요하게 사유하다 보면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지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를 만나 어떻게 해야겠다는 식의 길이 보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몰입해야 해요. 한마디로 미쳐야 하죠.”
그래서 그는 하나에 미쳐서 몰입할 수 있는 기회, 자기만의 ‘꿈꿀 권리’를 박탈당한 요즘 아이들이 걱정이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한테 ‘요즘 어떻게 지내니?’ 하고 물었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엄마들은 대학을 목표로 아이들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려고 열성이지만, 정작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이 1%의 영감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많이 놀아야 해요. 뇌가 몰입 상태에 이르려면 내 안의 흥이 깨어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흙을 만지고 물감을 짜고 발광을 해야죠. 발광發狂을 해야 발광發光하는 법이거든요.”
살아보니까 착한 사람은 항상 나쁜 사람한테 지기만 하더라고, 그게 역사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홍기 씨. 하지만 그는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전복을 꿈꾼다.
“착하고 순수한 사람은 나쁜 사람한테 이용당하기 쉽지만, 그 나쁜 놈을 이기는 게 있어요. 바로 이상한 놈이죠. 우리 사회에 인맥이나 학벌이 아니라 1%의 영감과 실력으로 승부하는 엉뚱하고 이상한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문화를 통해서 나쁜 놈을 이기는 이상한 놈의 통쾌한 복수극을 연출하는 것, 그게 바로 제가 바라는 꿈이죠.”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