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올드보이' '페이첵'

기억과 망각 '올드보이' '페이첵'

뇌 의학자가 본 영화

뇌2004년3월호
2010년 12월 07일 (화)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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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가지고도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몹시 고통스런 기억을 가진 사람은 심한 우울증과 비관 속에 빠져 버리기 쉽다. 이럴 때는 어떤 기계가 있어 이런 기억을 지워 준다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 보이’(2004) 에 나온 주인공 오대수 (최민식 역)는 자신의 이름을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뜻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술꾼이다. 너무나 평범하기 그지없어 초라하기까지한 그의 일상에 진실로 지우고 싶은 괴로운 기억이 끼어든다. 이유도 모르는 채 갇혀버린 골방에서 15년 만에 탈출한 그가 만난 첫 번째 여인은 일식집 종업원인 미도 (강혜정 역). 비슷한 사람은 서로 끌리는 법이라 그들은 만나자 마자 진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바로 자신의 딸이었던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등학교 동창인 이우진 (유지태 역)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철저한 복수극이었다는 설정이다. 영화의 결론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괴로워한 끝에 자기 혀를 잘라버린 대수가 눈덮힌 깊은 산 속에서 한 최면술사를 만나게 되고, 기억의 한 편을 지우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흰 눈처럼 하얘진 기억으로 다시 미도를 포옹한다.


단기기억삭제가 정말 가능할까?

남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이런 장면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영화 ‘페이첵’ (2004)에도 나온다. 오우삼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작가 필립 K. 딕의 상상력이 합쳐진 이 작품에 나오는 기억 지우기 방법은 좀더 과학적이다. 아니 적어도 과학적인 척은 한다. 줄거리는 인간의 기억을 조종해 지구의 미래를 장악하려는 한 사악한 회사는 천재 공학자 마이클 제닝스 (벤 애플릭 역)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기계를 개발한 후,  최근 3년 동안의 기억을 없애는 대가로 엄청난 돈을 주기로 계약한다.

그러나 기억 제거 시술 후 깨어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열아홉 개의 잡다한 물건들 (예컨대 핀, 못, 동전, 신문지에서 오려낸 단어 맞추기 퍼즐 등이 담긴 봉투뿐 이다. 거래하던 은행에 가 보니 그가 그의 권리인 주식을 포기했다는 문서가 확인되고 그 문서에는 엄연히 자신의 사인이 적혀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제닝스는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봉투 속의 물건들을 가지고 사건을 추리해 나가기 시작하고, 이런 그를 생물학자이자 연인인 레이첼 (우마 서먼 역)이 돕는다. 이들을 제거하려는 회사 조직으로부터 쫓기면서 제닝스는 열아홉 가지 물건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그의 생명을 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기억 지우기 방법은 이렇다. 우선 우리가 CT를 찍듯이 사람의 머리를 기계 속에 고정한 후 뇌 속을 영상화 한다. 보통 CT는 뇌의 구조물을 영상화 하지만 이 기계는 뇌 속의 세포를 크게 확대시켜 하나하나 볼 수 있도록 나타낸다. 그 후 화면에 나타난 각개의 세포를 자극하면 그 세포에 담긴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면으로 비친다. 예컨대 어떤 기억세포를 공격하면 며칠 전 같은 직장의 여성과 키스했던 장면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식이다. 그리고 이 세포를 파괴시키면 이와 함께 그 기억도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제닝스의 최근 3년간의 기억을 지운다.

기억과 망각은 신경회로의 복합작용

영화에 나온 이런 시술은 나로 하여금 감마나이프라는 뇌 질환 치료법을 연상시킨다. 뇌의 중심부에 종양이 생기면 수술 요법으로 이를 제거하기는 힘들다. 수술 과정 중에 주변의 정상 뇌 조직이 많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이때 환자의 머리를 기계를 사용해 고정시키고 종양을 중심으로 감마선을 360도 회전하며 여러 차례 쪼이면 종양을 선택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뇌세포를 파괴하고 기에 담긴 기억을 지우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는 뇌 세포를 사용해 기억을 한다. 하지만 뇌 신경세포가 모두 기억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과 관련된 세포들은 따로 있는데 이들은 복잡한 회로를 이루고 있다. 이런 세포들이 기억을 형성하는 기전으로 노벨 의학상 수상자 에릭 칸델은 일찍이 신경전달물질 설을 주장해 왔다. 신경세포와 세포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신경전달물질이 흐르며 이 물질로 인해 신경세포 사이의 정보 교환이 가능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신경전달물질은 신경세포의 벽에 붙어있는 수용체에 작용해야만 한다. 즉 신경세포의 수용체는 그 세포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대문 같은 곳이다.

칸델의 견해에 의하면 신경세포가 여러 번 자극됨에 따라 (즉 우리가 여러 번 동일한 상황을 경험함에 따라) 수용체를 경유하는 신경전달물질의 이동 통로가 더욱 단순하게 되며 이로써 정보가 기억된다는 것이다. 기억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로는 글루타민이 중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험동물에서 글루타민이 작용하는 수용체를 파괴하면 그 동물은 기억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수용체를 활성화 시키면 기억 작용이 항진된다.

한편 캘리포니아 대학의 린치 교수는 기억이란 신경세포들의 새로운 회로 건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A라는 신경이 평소 B신경과 연결 되어 있다면 학습에 의해 A 신경 말단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와 C 신경과도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신경전달물질 설과 신경세포 연결설을 옹호 혹은 배척하는 여러 증거들이 있으나 아마도 이 두 가정은 모두 옳을지도 모른다. 즉 이 두 가지 사실이 서로 상호 작용하여 새로운 기억의 회로를 형성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영화 ‘페이첵’에 나오는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기억은 세포 하나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경들이 회로를 이루며 구성한다. 따라서 한 개의 세포를 파괴한다고 어떤 특정한 기억이 소실될 수는 없다. 게다가 어떤 세포를 자극했을 때 특정한 기억 정보가 스크린에 영상으로 표현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페이첵이 가진 또 하나의 오류

최근 프린스턴 대학의 그로스 교수 팀은 원숭이의 해마에서 하루에 수천 개의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기며 이들의 축삭은 대뇌피질을 향해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경세포 형성이 과연 원숭이의 기억 형성과 관계되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만일 이처럼 새롭게 생기는 신경세포가 기억과 관계된다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이는 기억 형성에 대한 제 3의 가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형성되는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최근에 만들어진 기억을 없앤다는 영화속 가정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페이첵에는 또 한가지 중대한 오류가 있다.


영화에서 악당들은 제닝스의 최근 3년 동안의 기억만 선택적으로 없앤다고 했는데 이 역시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기억은 서재의 서류처럼 시간 별로 구분되어 차곡차곡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기억 (최근 기억)과 장기기억 (오래된 기억)이 각각 뇌의 다른 곳에 저장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여성을 보았을 때 그 여성의 잔상은 시각 중추인 후두엽에 잠시 남는다 (순간 기억). 당신이 이 여성에 관심이 없다면 그 기억은 금방 지워진다.

그러나 만일 이 여성이 무척 아름다웠다면, 혹은 이 여성을 여러 차례 보게 되었다면 그 모습은 나름대로 중요한 정보로서 ‘해마’에 있는 기억 세포들에 의해 기억된다. 그러나 해마에 저장된 기억 역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언젠가는 사라진다. 만일 그 여성이 다름아닌 당신의 아내였다면, 즉 매일같이 당신의 시각중추를 자극하는 중요한 존재라면, 아내의 기억은 해마가 아닌 신피질로 옮겨져 영구적으로 저장된다. 따라서 영화 ‘페이첵’의 경우 해마에 위치한 신경세포만을 파괴한다면  최근 기억을 선택적으로 없애버릴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정확히 3년 동안의 기억을 없애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망각, 인간의 뇌에 내려진 축복?

‘올드보이’와 ‘페이첵’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생각은 우리 뇌에 존재하는 망각 시스템이다. 최근 학자들은 우리 뇌에는 기억회로 이외에 망각을 위한 메커니즘도 존재함을 밝혀내고 있다. 우리 삶에 있어 기억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적당히 잊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뇌도 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망각 작용을 연구하기 위해 유명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가 이용된다. 실험동물에게 전기 자극을 가하면 이들이 고통스러워한다. 그런데 전기 자극을 주기 직전에 매번 종을 치면 나중에는 종을 치기만 해도 이를 고통스럽게 느낀다. 반복적인 학습에 의해 동물들은 종소리는 곧 고통의 신호란 사실을 기억한 것이다. 하지만 종을 친후 전기 자극을 가하지 않기를 여러 차례 계속하면 나중에는 종을 쳐도 고통스런 표정을 짓지 않게 된다. 즉 그들은 이제 종소리와 연관된 고통의 기억을 망각한 것이다.


위에서 기억 작용과 관계되는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은 글루타민이라 했지만 이런 망각작용에도 글루타민 및 이의 수용체가 관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글루타민 수용체를 억제하는 약을 주면 망각 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루타민 보다는 변연계의 카나보이드 신경전달물질 시스템이 망각에 중요하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 카나보이드가 선천적으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유전자 조작을 한 동물은 망각작용을 갖지 못한다. 또한 정상 동물에서 카나보이드 수용체를 억제시키는 약을 주어도 역시 망각에 이르지 못한다. 종을 칠 때 마다 언제나 고통스런 느낌을 갖아야 하는 망각 기능을 잃어버린 동물들을 보면, 망각 역시 기억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기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처럼 망각에 중요한 카나보이드는 마약의 일종인 마리화나의 주 성분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의 삶은 기억과 망각 기능의 조화로운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뇌는 때론 기억하기 위해, 때론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에서 오대수는 괴로운 기억을 망각하려 애쓰고, 제닝스는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지만, 사실 이런 모습들은 우리들의 뇌 안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일들인 것이다.

글│김종성  jongskim@amc.seoul.kr  울산대의대 서울 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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