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유혹

다양한 기억장애들

뇌2003년5월호
2010년 12월 22일 (수) 21:36
조회수13300
인쇄 링크복사 작게 크게
복사되었습니다.

자꾸 깜빡 깜빡 잊어버리는 건망증으로 혹시 치매에 걸리지 않았을까, 혹은 기억 기능에 커다란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염려 놓아라. 이런 건망증은 뇌에 심각한 이상이 있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심인성인 경우가 많다. 기분이 조금 우울해질 때 혹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깜빡 이전의 일들을 잊어버리곤 하는데 이런 증상은 금방 회복된다.

작은 세계에서 보면, 기억을 하게 만드는 것은 두뇌의 신경세포들이다. 어떤 경험을 하면 신경세포들 끼리 신호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망이 발달하게 된다. 이 회로망이 잘 유지되면 기억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끊어지면 혼란이 생기거나 기억이 잘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작은 세계로 들어가 보면 처음 어떤 경험을 하면, 이 때문에 자극을 받은 신경세포 내에서는 특수한 단백질이 순간적으로 변형되며 신호가 아주 잘 전해지게 된다. 기억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경세포에는 변형된 단백질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효소가 있다. 그래서 변형된 단백질은 금세 복원되고 그 결과 우리는 기억했던 것을 잊게 된다. 예를 들어 전화번호를 한 번 듣고 잠깐 기억했다가 다시 잊게 되는 동안, 신경세포 안에서는 이렇게 기억과 관련된 단백질이 변형됐다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이 일어난다. 

무력감과 우울증이 찾아와 기억력이 깜빡깜빡 한다면 로즈메리 향으로 신경 세포에 자극을 주는 것도 좋다.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로즈메리는 추억을 위한 것, 기도하고, 사랑하고, 회상하라…(햄릿의 오필리아가 읊조린 대사)’라고 했다. 최근 그의 로즈메리 향에 대한 대사는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뉴캐슬 노섬브리어 대학 과학자들은 ‘상록 관목식물인 로즈메리는 주의력을 높여 장기적으로 기억력을 15% 가량 높이는 것으로 실험결과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다양한 기억장애들








영화 <메멘토>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망각이나 기억상실은 자신이 회피하고 싶은 기억이나 정신적인 충격을 방어하기 위해 일부러 잊으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본다. ‘방어와 회피’라는 역동적인 목적이 있는 능동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또 협조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도둑이 들어 금고번호를 말하라고 위협할 때, 금고번호를 갑자기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이다.

이와는 상반된 증상으로 과거의 일을 극도로 세밀하게 기억하는 ‘과거 편집증’도 있다. 자신의 과도한 경계심이나 의혹으로 인해 타인의 악의를 탐지하기 위하여 과거를 끊임없이 검색한다. 병이 심하면 자신의 왜곡된 신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건들을 회상해내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그보다는 증세가 좀 약한 편집증 형태를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섭섭하게 대한 일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 두는 ‘불평불만 수집가’들 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환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극적으로 체험되는 기억 상실증은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증세가 조금씩 다르다. 가장 잘 알려진 기억상실증 유형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거나 머리에 외상을 입은 후 충격 이전의 기억을 상실하는 ‘퇴행성 기억상실증’이다. TV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주인공 준상(배용준)은 사랑하는 유진이 자신의 의붓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이어 교통사고로 머리에 외상을 입은 충격으로 예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때론 기억된 내용 자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기능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기억상실증 환자는 예전에 썼던 물건이나 옛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상실한 기억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다. 영화 ‘오버더 레인보우’에서 주인공 기상 캐스터 진수(이정재)는 교통사고로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려 짝사랑 한 연인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신경과학자들은 정신적 충격이나 두부 손상으로 인해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만 사라지는 현상을 ‘루카나 기억상실증’이라고 부른다. 지하철유실물센터에서 일하는 대학 동창 연희는 진수가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녀는 분실물을 찾아주듯 단서를 제공, 두 사람은 사랑의 기억을 수집해 간다.

또 충격이나 외상 이후 새로운 기억을 갖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도 있다.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것. 단기기억은 이마 뒤에 위치한 전전두엽이라는 뇌 영역에서 일어난다. 단기기억으로 얻은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역할은 해마에서 담당한다. 해마가 손상되면 레너드처럼 옛날 기억은 갖고 있지만 새로 얻은 기억은 오랫동안 간직할 수 없게 돼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되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G라는 것이 전부이다. 레너드는 범인을 잡기 위한 방법으로 메모와 문신을 사용한다. 묵고 있는 호텔, 방문했던 모든 장소, 만나는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고, 항상 메모를 해두며, 심지어는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하여 기억을 대신 한다. 그러나 결국 그 기록물마저도 변형 가능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기억에 대한 도전적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내 기억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라고.


기억의 조작

우리는 과거 기억의 기초 위에 현재를 세운다. 그리고 적절한 조건에서 과거의 조각들을 짜 맞추는 과정에서 기억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기억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의미 부여로 더 창조적인 결과물을 생산해 내는가 하면, 왜곡된 해석과 합리화로 자기를 기만하거나 혼돈에 빠뜨릴 수도 있다.  

최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된 ‘솔라리스’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철학적 SF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솔라리스라는 별을 돌고 있는 우주정거장. 그곳에 파견된 과학자들은 꿈틀꿈틀 요동치는 보라빛의 별, 신비한 솔라리스를 연구하는 동안 이상한 환각에 빠져들게 된다. 솔라리스는 기억과 판타지를 물질화해 보여주는 에너지 시스템을 가진 별이다. 켈빈은 솔라리스에서 자살한 아내 레아를 다시 만난다. 레아는 켈빈의 기억이 빚어낸 환영일까? 아니면 진짜 솔라리스라는 별에서는 존재 가능한 그 무엇일까? 만약, 솔라리스와 같은 별이 있다는 가정 하에 내가 그 별을 방문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다시 편집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을 늘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위) 드라마 <겨울연가>
(아래)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


흥미로운 것은 솔라리스에 환영으로 나타난 레아가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한다는 점이다. 레아는 “난 레아가 아니야. 당신의 기억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라고 켈빈에게 말한다. 자신의 관념이나 감정 때문에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최근 심리학에서는 기억이 어떻게 조작 가능한 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미국 퓨지트 사운드대학 심리학과 마크 라인츠 박사는 ‘대학생 48명에게 길바닥에 바나나 껍질이 있으면 넘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이틀 뒤 학생들에게 1초간 사람이 바나나 껍질 앞으로 다가가는 사진을 보여줬더니 학생 중 68%가 넘어져 있는 사진을 이미 연상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즉 그 전의 정보를 종합해 진짜가 아닌 것도 인과 관계로 추론해 거짓을 진짜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미국 워싱턴 대학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롭터스 교수는 조작된 광고를 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억까지 바꾸어버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디즈니랜드 광고에 만화영화 주인공 벅스 버니를 등장시켰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수많은 만화영화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지만 벅스 버니는 결코 만날 수 없다. 버니는 워너 브라더스 사의 캐릭터이기 때문. 그런데 벅스 버니가 등장하는 디즈니랜드 광고를 본 실험대상자 40%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보았다고 말했다. 이 또한 지식(정보)이 기억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태어날 때 자신의 탯줄이 끊긴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식’이 실제 ‘기억’으로 간직되는 예이다. 이렇게 가공된 기억은 상품 구매로 이어진다. 디즈니랜드에서 실제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사람들도 주인공이 그곳을 방문해 멋진 경험을 하는 광고를 보면서 그러한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망각은 창조의 과정

기억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망각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럼 좋았던 일도 잊어버리는 게 좋을까. 창조적 마인드에 대하여 연구해 온 하버드대 심리학과 앨렌 랭거 교수는 전부는 아니지만 웬만큼 좋았던 일도 잊는 게 좋다고 말한다. 과거 동료와 잘 지낸 즐거운 기억이 있다하자. 그런데 현재 새로 만나게 된 동료를 그 전의 동료와 비교하다보면 과거의 기억은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는 “기억이 체험을 하고자 하는 열정을 식힌다. 괴로웠던 경험에 대한 기억은 다시는 그러한 체험을 하고 싶지 않게 만들 수 있으며, 때로는 즐거웠던 추억조차 단지 떠올리기만 하는 차원에 그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앨렌 랭거는 지식의 유무가 창의성 발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 했다. 강의실 바닥을 강으로 가정하고 학생에게 강 위에 작은 나무 블록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어,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블록 사용법을 먼저 보여주고, 다른 한 그룹은 그냥 작업에 바로 들어가게 했다. 결과는 블록 사용법을 보여 준 그룹의 92%가 실례와 같은 방법으로 블록을 쌓았고, 다른 한 그룹에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다리를 만든 사람이 8퍼센트에 불과했다. 또 미리 정보를 제공받은 그룹에서는 다리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 나왔고, 그렇지 않은 그룹에서는 열 가지 방법이 나왔다. 이 실험은 예비지식을 갖고 있으면 그 범주 내에서 사고하게 되어, 특히 창의적 발상이 필요한 경우에는 오히려 기억된 정보나 지식이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기억이나 망각 자체를 문제시 할 수는 없다. 뇌로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 유연하게 반응하고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정보처리 마인드를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글│곽문주 joojoo@powerbrain.co.kr

ⓒ 브레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 뉴스

설명글
인기기사는 최근 7일간 조회수, 댓글수, 호응이 높은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