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키워드가 됐던 것 중에 스토리텔링이 있다. 사실 스토리텔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쓸 때부터 있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스토리텔링이 뜰까?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스토리텔링이 뜨는 것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스토리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 승자 독식 구조에 순응하며 뻔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자기만의 스토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취업 준비생을 위한 실용서를 찾을 나이도 지났고, 새삼스럽게 스펙을 쌓아야 할 처지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스토리’ 때문이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의 저자 김정태 씨는 충분히 ‘스펙’이 좋은 사람이다. 고려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했고,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UN 거버넌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2008년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언론 홍보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른네 살에 이미 열 권의 책을 쓴 저술가이기도 하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스펙이 화려해도 되는 건가. 살짝 배신감이 느껴진다. 그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친다.
“저는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서 이 자리에 온 게 아니에요. 철저히 저만의 스토리를 따라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요즘의 88만원 세대가 그러하듯 그도 대학을 졸업할 즈음 황무지에 내던져진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학부를 졸업할 때쯤 저를 돌아보니까 스펙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어요. 취직도 잘 되지 않는 한국사를 전공했죠, 남들 다 따는 토익 점수도 없고, 1등으로 졸업한 것도 아니고, 인턴십 경험이나 공모전에서 상을 탄 경력, 컴퓨터 활용 능력도 없었어요. 사회에서 원하는 능력이라곤 어느 것 하나 갖춘 것이 없는 사람이었죠.”
스펙 중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영락없는 낙오자였다. 마음속엔 꿈과 역량을 펼치고 싶은 열정이 꿈틀거렸지만 어디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했다.
그럴 때 선택은 두 가지다. 그때부터라도 부랴부랴 스펙을 쌓느라 남은 20대를 보내느냐, 아니면 자기만의 스토리를 따라 과감하게 일탈을 감행하느냐. 발상의 전환. 그는 한국 사회에 자신의 역량을 끼워 맞추는 대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스토리를 따라가기 시작한 그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침 베이징대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겨 중국에 가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기보다 사회에서 내몰린 측면도 있어요. 일반적인 사회 시스템에 안주했다면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는 게 정상이었겠죠. 연봉 얼마, 몇 년 후에 차장 되고 부장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요.
그런데 저를 가만히 들여다봤을 때 내가 가진 잠재력은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저도 대기업, 관공소, 외국계 기업 인턴, NGO 등의 활동을 통해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많이 찾아다녔거든요. 그런데 영리를 추구하는 조직에는 제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어요.
제 장점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사회가 말한 정상적인 방향으로 가면 나의 잠재력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됐어요.”
하지만 행운은 아직 그의 편이 아니었다. 중국에 간 지 3개월 만에 사스가 창궐하면서 학업이 중단된 것. 할 일이 없어서 여행을 떠났다. 길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실크로드로.
“빡빡하고 경직된 한국 사회를 벗어나보니까 그제야 제 잠재력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외국인들과 함께 지내고 여행을 다니면서 한국에선 통하지 않던 국제적인 감각과 친화력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국제 활동 영역에서 나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국제대학원에 가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뉴욕에 가게 되었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니까 벌써 서른이에요. 경험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는 막막함은 여전했지만, 그때의 막막함은 대학을 졸업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어요. 내가 뭘 하고 싶고, 삶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이미 명확하게 알고 있었거든요.”
맞다. 한국 사회에서 제도 교육만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할 기회가 별로 없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성찰할 기회는 더더욱 없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큰 그림을 그리기 전에 사회에서 제시한 모범답안에 갇히기 쉽다.
그래서 많은 88만원 세대가 보다 안정적인 삶을 찾아 고시를 준비하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다가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때 학원강사에 안주한다. 뼈아픈 현실이다. 하지만 평균 연령 80세,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 시시할 정도로 뻔한 삶을 살아내기엔 견뎌야 할 인생이 너무 길다. 그게 스펙보다 스토리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재작년부터 후배들 진로 상담을 해주고 있는데, 그게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요즘 20대는 스펙을 많이 고민해요. 어쩔 수 없죠. 취직을 하려면 스펙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게 저는 학부 생활 하는 동안 스펙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 내가 어떻게 UN에서 일하게 됐을까? 운이 좋았나? 인덕이 있었나? 그렇게 돌아보니 스펙이 아니라 스토리가 보였어요.”
그는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성공을 단념하자 내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비교를 멈추자 구별되기 시작했다. 최고를 포기하자 유일의 길로 나아갔다. 상품을 포기하자 작품으로 변해갔다. 욕망을 내려놓자 만족이 찾아왔다. 경쟁을 피하자 공존이 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라고 썼다.
그럴 수밖에 없다. 스펙의 천적은 시간이지만, 시간은 최대 지원군이니까. 스펙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드러나지만 스토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풍성해진다. 스펙은 성공 경험만을 나열하지만 스토리는 실패 경험까지도 껴안는다. 스펙은 1등이 되어야만 인정받지만 스토리는 스토리 자체로 차별화된다. 무엇이든 복제 가능한 이 세상에서 절대 복제할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져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스토리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을까? 그는 ‘업’을 찾아야 비로소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귀띔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
이는 단순히 어떤 직업을 갖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추구해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문제다. ‘업業’을 알게 되면 ‘직職’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그럴 때 기회는 절로 찾아온다는 것. 뻔하고 진부한 스토리가 다이내믹해지는 것도 바로 이 순간부터다.
업에 대한 의욕과 열정은 넘치지만 지금 막상 내놓을 역량이 부족해서 자신이 없다면?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면 가치를 끌어오면 돼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실현하려고 하는 가치가 있죠? 저에게는 그게 ‘공공이익의 증진’입니다.
그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녀요. 나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혹은 스펙을 쌓기 위해서 알리고 다니면 사람들은 심드렁하게 반응해요. 경쟁 중심의 사회에서 내 스펙을 채워주기 위해 같이 노력해줄 사람은 없거든요. 하지만 가치는 다릅니다.
가치를 내세우면 너도 나도 그걸 실현시켜주려고 노력해요. 가치는 스토리거든요. 나 혼자 잘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이 추구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역량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자기 가치를 이야기하고 다니세요. 도와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이루어집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왔던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스토리를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어떤 사람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유일한 스토리가 있어요. 어떤 스토리든 그 스토리를 원하는 단 한 사람의 독자는 있기 마련이고요. 모든 사람이 자기 스토리를 써나가는 삶을 사는 것, 그게 궁극적인 인간 개발이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경쟁을 멈추고 자기만의 스토리에 집중해서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활기차고 풍요로워질까? 그의 스토리텔링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 | 사진·김명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