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딥마인드가 인공지능의 ‘마음’을 연구하고 있는 지금, 거대한 철학적 질문이 다시금 인류 앞에 놓였다. 인간만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뇌가 있어야만 지능이 존재하는가?
chatGPT, Gemini, Perplexity 등 대형언어모델(LLM)이 사람처럼 대화하며 심리 상담을 해주고 그림과 영상을 포함해 온갖 창작물까지 만들어내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지능과 의식의 본질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뇌를 가진 유기체, 그중에서도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다. 이 책 《뇌 없이도 생각할 수 있는가》는 그 틀을 깨는 강력한 도전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을 거세게 뒤흔든 양자역학의 등장에 비견할 만한 이 책의 대담한 시도는 식물지능을 통해 ‘살아있는 지능’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기계적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식물은 뇌도, 신경도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많은 결정을 내리고, 환경을 예측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성장해나간다. 이 책은 신경과학, 식물생리학, 심리학,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식물이 보여주는 고차원적 정보처리 능력을 조명한다.
단순히 식물의 생존 전략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인공지능이 나아갈 방향을 근본부터 다시 그려보게 만든다. 생명을 이해하는 관점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자, 인간이라는 존재를 되돌아보는 과학적·철학적 실천이기도 한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의식과 지능은 물론, 자기 자신을 더 넓은 틀에서 낯설게,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움직이지 않기에 더 정교하게 사고하는 식물지능
이 책을 쓴 파코 칼보는 인지과학자이자 생물철학자로 스페인 무르시아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치고 학제간 연구의 최전선에서 식물지능을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파코 칼보의 첫 책으로 식물지능에 대한 가장 최신의 연구 성과를 대중적으로 상세히 풀어주고 있다.
이야기는 초록의 생명에게 화학적 자장가를 불러주며 시작된다. 동물을 마취시키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물질의 작용으로 ‘잠이 드는’ 미모사 실험을 소개하며, 오랜 진화 과정의 연속선상에서 생명체들이 생화학적으로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20세기 들어서야 동물행동학의 등장과 함께 인간 아닌 생명의 의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인류에게 저자는 “모든 유기체는 고유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식물행동학’의 등장을 암시한다. 온갖 식물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식물맹’이라는 학술 용어가 있을 정도로 식물을 그저 “녹색의 배경” 정도로 여기는 인류에게 저자의 연구는 새로운 경종을 울린다.
이동성이 큰 동물에 비해 땅에 뿌리내린 식물은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결과를 남김없이 모조리 감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식물은 우리보다 훨씬 오랫동안 적은 에너지로 지구라는 환경에 적응해 살아왔다.
식물이 내리는 결정이 단순했다면 복잡한 지구 생태계 속에 이토록 풍요로운 종 다양성이 일구어질 수 있었을까. “독창적으로 성장하는” 식물지능이라는 이 책의 아이디어는 단순한 생물학의 문제를 넘어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생존 전략과 사고 모델을 제공해준다.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찾아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과학·기술 시대에 다시 이 땅 위의 식물을 호명하는 이유다.
식물은 온몸으로 사고한다
식물은 뿌리부터 잎끝에 이르는 몸 전체를 통해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다. 빛의 다섯 가지 스펙트럼 영역뿐만 아니라 낮의 길이와 계절의 변화, 기온과 습도, 진동과 염도, 시간에 따른 영양 성분 변화, 토양 내 미생물, 이웃과의 경쟁 등 수많은 변수 사이에서 생존에 최선인 선택을 내린다.
식물에는 뇌가 없지만, 대신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관다발계가 존재한다. 이 구조는 동물의 신경계처럼 물, 당, 신호 물질 등을 이동시키며 정보를 주고받는다. 식물에서 발견된 세로토닌, 도파민, GABA, 글루탐산염과 같은 물질들은 인간의 신경전달물질과 동일하다. 상처를 입은 부위에서 전기적 신호가 출발해 식물 전체로 퍼지며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는 과정은 마치 통증을 느끼고 대처하는 동물의 행동과 닮았다.
뇌라는 특정 기관과 신경세포가 없는 식물의 사고는 몸 전체에 ‘분산’되어 일어난다. 뿌리에서 잎까지 모든 부위가 정보를 감지하고 판단하며, 그에 따라 각자 반응한다. 이는 인지 중 절반 이상이 다리에서 일어나는 문어의 다중 의식 체계와도 유사하다. 인간 중심의 의식 모델이 중심 제어식이라면, 식물은 네트워크 기반 분산형 사고 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AI와 인지과학이 주목하는 새로운 지능의 가능성을 자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구현하고 있었다.
생존을 목표로 삼은 판단에는 옳고 그름이 명확하다. 잘못된 판단으로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당황하고, 놀라게 된다. 이는 식물에서도 마찬가지다. AI는 빠르게 연산하지만 ‘예측에 실패한 놀라움’에 적절히 대응하는 능력은 아직 미비하다.
이 책은 분산형 사고 체계를 지닌 식물이 자신이 예측한 결과가 어긋났을 때 환경을 어떻게 탐색하고 수정하는지를 통해 진정한 인지와 의식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식물은 감각기관이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운동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변화하는 상황에 자신을 조율하며, 생존을 위한 최적의 판단을 수행한다.
이러한 생물적 사고방식은 단순 계산 능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저자는 통합정보이론, 생물기호학, 생태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식물의 행동을 해석하며, 인간과 기계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인지 모델’로서의 식물지능을 제안한다.
장식이나 작물이 아닌 주체로서의 식물, 반려와 공존의 윤리
인지는 단순히 유기체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능력’이 아니라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과정’이다. 유기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가 외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살펴야만 진정한 의미의 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인지는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 실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기후 변화 속에서 식물이 어떤 식으로 논의되는지를 잠시 떠올려보자. 여전히 인류는 먹고사는 문제에 갇혀 그저 작물 성장률을 높일 방법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지구의 생물권 앞에서도 여전히 식물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조작되고, 재배되고, 심지어 우주로 이동되는 수동적 자원”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식물을 자원으로만 보지 않고 스스로 환경을 인식하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인지적 존재’로 바라본다면, 식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전혀 다른 과학적·윤리적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인식 전환은 기술에도 영향을 미쳐 식물처럼 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자라나는 생체모방 로봇 ‘그로우봇(Growbot)’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식물의 분산형 지능과 구조적 유연성을 본뜬 이 기술은 생명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새로운 기계지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식물처럼 느리고 신중하지만 환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조화를 이루는 존재방식,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기술과 삶 모두에서 배워야 할 가장 급진적이고 생태적인 상상일 것이다.
글. 우정남 기자 insigth15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