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보다 가치에 주목하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과학자들
인공지능이 아니라 뇌활용으로
21일은 과학의 날입니다. 매년 과학기술진흥에 힘써온 과학자에게 포상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물론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가장 받고 싶은 최고의 상은 노벨과학상이겠죠. 그러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매년 나오지만 세상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하물며 과학상 수상자 숫자만큼 지구의 환경파괴가 개선되고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지구온난화는 심해지고 그 피해는 수많은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 생명들입니다. 이제 과학자라면 본인의 업적에만 속도를 낼 것이 아니라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세기의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출처=위키피디아)
그는 과학자 이전에 철학자였고 교육자였습니다. 또한 암기교육의 희생자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엄격한 교육방식에 적응하지 못했고 암기중심의 학교교육에도 뒤처졌습니다. 졸업장도 없어서 독일에서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스위스로 옮겼고 거기서도 한차례 낙방 끝에 연방공과대학 물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시절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 교수가 그를 ‘게으른 개’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교수들이 가르치지 않은 전자기학을 홀로 공부했습니다. 졸업하고 스위스 특허국에 취업합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신의 생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바꾼 상대성이론도 그렇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생전에 남긴 발언입니다. 인간의 뇌는 10%만 쓴다고 한 것은 그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남들을 위해서 산 삶만이 가치 있는 삶” , “개인의 삶은 다른 생명들의 삶을 좀 더 고귀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때만 의미가 있다”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이것이 단군의 홍익인간 철학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실천에 옮기는 과학자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는 남미 페루의 마을에 자전거페달을 이용하여 세탁기를 돌리는 장치인 바이슬아바도라는 자전거세탁기를 보급했습니다. 독일 과학자들은 인도나 아프리카 여인들이 폐암에 많이 걸리는 이유가 물에 젖은 나무나 나무뿌리를 캐내어 움막집에서 불을 땔 때 나오는 연기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조리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스테인리스로 태양열을 모아 조리하는 기구입니다. 이러한 조리기구로 인해 연기를 잡았을 뿐 아니라 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이 사막화되어 가는 아프리카에서 나무를 남벌하는 문제도 해결하고 땔감을 찾아 온 종일 들판을 헤매는 수고를 덜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자들을 길러내는 것은 결국 학교교육입니다.
▲ 대학수학능력시험를 대비하기 위해 공부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출처=정책브리핑)
아인슈타인은 “학교는 젊은이가 그곳을 떠날 때 조화로운 인간성을 갖추고 있기를 바라야 하지 전문가가 되어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잘 훈련된 개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시험에도 반대합니다. 시험은 공부에 대한 흥미를 저해할 뿐이라는 거죠. 아인슈타인은 “교육의 가치는 많은 사실을 배우는 게 아니라 교과서로 못 배우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방식을 훈련하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그의 당부는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진흥법을 제정한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합니다.
지난달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기사 이세돌을 이기면서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의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퍼졌습니다. IT전문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로봇의 발달로 10년 후에는 전체 직업의 3분의 1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나 로봇 또한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은 “인공지능 알파고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인간이 대단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인간의 의식수준”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이세돌 기사가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대결을 벌이고 있다(사진=한국기원)
인간은 자신이 만든 종교에 구속되면서 죄인처럼 살다가 해방된 것은 지동설이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천동설이 과학자의 발견으로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 것이죠. 지금은 인간이 만든 기계에 구속될 판입니다. 그렇다고 기계파괴운동을 벌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이 강조하듯 인간의 가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이 총장은 천동설과 지동설을 넘어 ‘인동설(人動說)’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인류가 인공지능을 활용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의 문제는 자연지능을 가진 인간의 뇌 활용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며 “지구를 잘 관리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며 이것이 바로 인동설의 의미”라고 강조했습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지구시민이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만들어야합니다. 종교나 국가관에 갇힌다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 지진 피해자 성금에 나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그 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지금은 신에게 기도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그러한 힘이 과학교육에서 길러져야 하지 않을까요?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 참고문헌
손석춘, <진정한 천재-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기획회의393》,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앨리스 칼라프리스, 《아인슈타인이 말합니다》, 에이도스 2015년.
이인식 염재호외, 《따뜻한 기술》, 고즈원 2012년.
일지 이승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지구경영, 홍익에서 답을 찾다》, 한문화 2016년.
일지 이승헌, "21세기는 인류가 문명의 중심인 인동설(人動說)의 시대”, 국제뇌교육학회 ‘학회 창립 선포식 및 뇌교육미래포럼’, 2016년 3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