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음, 당신은 좌뇌가 발달한 유형이군요”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도 그 말에는 당신이 논리적으로 사고하거나, 숫자에 강하거나, 분석적인 성향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덧붙여 그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창조적이고 직관적이며 예술적이라는 우뇌의 성향도 함께 갖고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 것이다. 또는 왜 좌뇌와 우뇌는 둘 다 고르게 발달한 평형 상태를 이루지 못하는지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좌뇌와 우뇌라는, 뇌의 두 반구가 서로 협력하여 작동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국의 심리학자인 이언 맥길크리스트Iain Mcgilchrist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좌뇌가 지배적인 상태를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 뇌의 기능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그의 말이 맞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언 맥길크리스트는 자신의 책 《주인과 심부름꾼 :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배신과 정복의 스토리(The master and his Emissary : The Divided Brain and the Making of the western world)》에서 우리의 좌뇌와 우뇌가 얼마나 상이한 ‘개성’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뇌의 기능이 ‘분리되어’ 작용한다는 맥락에서 서구 문명의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주장과 해석을 들려준다.
맥길크리스트 박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 영문학을 공부하고 올소울스 칼리지에서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심리학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만년에 들어서다.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뇌영상을 연구한 후, 런던의 베들렘 및 모즐리 왕립병원에서 정신과 의사와 병원장을 지냈다. 맥길크리스트는 그 과정에서 신경심리학을 비롯해 심리학의 다양한 영역에 흥미를 갖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법의학 전문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담은 많은 책을 출간한 바 있다.
맥길크리스트는 《주인과 심부름꾼》의 제목을 철학자 니체가 말한 한 우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슬기로운 영적 지도자가 작지만 풍요로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일꾼들을 정해 영토를 관리하게 했는데, 그중 한 일꾼이 스스로 자신을 지도자인 양 여기고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일꾼은 영적 지도자가 가진 자기 절제나 중용을 ‘나약함’이라고 무시하며 지도자의 권한을 침범해 자기 나름의 횡포와 독재를 일삼았다. 결국 나라는 황폐해지고 말았다.
맥길크리스트 박사는 인간의 우뇌와 좌뇌를 이 우화에 등장하는 지도자와 일꾼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는 뇌의 양쪽 반구가 서로 협력해야 함에도 일정 시간 동안 서로 옥신각신 갈등을 빚어왔고,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주도권이 일꾼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고 말한다. 아울러 인간의 좌뇌는 여러모로 재주는 있지만, 동시에 위험한 야심으로 가득 찬 독재자처럼 구는 경향이 있다고 경고한다.
좌뇌와 우뇌의 상호작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우리 뇌의 양쪽 반구가 서로 다르게 기능한다는 이론은 ‘다윈주의자Darwinian’의 견해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우선시하는 것에 바쁘게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새가 둥지를 짓기 위해 잔가지를 끊임없이 물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새는 다른 천적이 새끼나 알을 물어가지는 않는지, 또는 다른 경쟁자가 자기 둥지를 차지하려고 노리지는 않는지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런 두 가지 행동 양식이 어떤 식으로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즉, 작은 부분을 면밀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집중하는 행위를 해야 하며, 동시에 본능적이든 또는 유전적인 환경의 결과물이든 맥락을 잡아서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살피는 행위도 동반해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양쪽 측면이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우리 뇌의 양쪽 반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됐다고 추측한다. 이 두 가지 ‘개별적인’ 행동 양식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뇌의 양쪽 반구는 ‘뇌량腦梁, corpus callosum’이라고 부르는 조직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이 뇌량은 흔히 양쪽 반구 사이의 정보 전달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뇌량이 하는 역할을 들여다보면 ‘정보의 전달’이라기보다는 상이한 정보가 부딪히거나 뒤엉키지 않도록 하는 ‘정보의 완충’ 역할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전달되어도 이 신경조직은 그 정보의 일부만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신경전달을 도리어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신경전달 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쪽 반구의 정보를 여과시켜주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여과 장치를 거친 후에야 우리는 현실을 현실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좌뇌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맥락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의식을 가진 존재는 도구를 이용함으로써 자기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물론 인간 외에 도구를 쓸 줄 아는 다른 생명체도 있지만, 그게 힘이 강해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도 이러한 능력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문명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벽돌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 건축물을 지어야 하며, 배수로와 관계수로 등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삶을 보다 쾌적하게 향상시키고 자신을 더욱 강력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그런 종류의 일을 해낸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유혹적이다.
이로써 인간은 모든 일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하나의 관념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창조해낸 기계로 세계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좌뇌적 사고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기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인식론이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데는 그리 썩 훌륭한 도구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찾아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생각의 범위를 그보다 좁은 영역에 고착시켜 현실적인 문제나 알고리즘에 대해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좌뇌가 지배적일 때 우리는 어떤 경향을 갖게 되나?
뇌의 양쪽 반구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든지, 또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상대적인 우위를 점한다는 연구 결과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좌뇌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며 매우 자신만만해 한다는 것이다. 좌뇌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 인해 좌뇌는 매우 풍부한 복잡성을 가지는 사물의 실재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좌뇌는 그저 인간에게 가능한 한 유용한 방향으로 외부 사물을 인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좌뇌가 하는 현실 묘사는 언제나 진짜 현실보다 단순하고 획일적일 수밖에 없다. 상당히 많은 실제 정보가 인식되지 못한 채 누락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사물을 단순화하여 특징 위주로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당신이 건축물을 설계하거나 사회운동을 한다면 지도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반드시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일에 대해 모두 알 필요는 없다. 이처럼 좌뇌가 그리는 세상은 우리가 세상과 접촉할 때 도움이 되는 일종의 설계도일 뿐이며, 우리가 교류하는 실제 세상과는 다를 수 있다.
이런 예를 들 수도 있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킹을 하면 갑자기 엄청난 숫자의 친구가 불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우리가 실제로 교류하는 현실의 친구는 줄어들었고, 삶은 복잡해졌으며, 시간은 항상 모자란다. 우리는 주변의 세상을 평화롭다고 인식하며 사회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뿐이다.
글·마거릿 에모리 Margaret Emory | 번역·구승준
이 기사는 국제뇌교육협회(IBREA) 발행 영문지 《BrainWorld》와의 기사 제휴를 통해 본지에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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