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는 일주일에 한 시간, 학급의 일을 의논하는 학급회의 시간이 있다. 우리반은 보통 금요일 6교시에 회의를 한다. 그런데 과거 초등학교에 다녀 본 사람이라면 학급회의라는 게 사실은 이미 주어진 생활목표에 맞추어 질서나 규칙을 지키도록 의도된 실천방법을 정하는 형식적인 회의라고 기억할 것이다.
이런 형식적인 회의가 싫어 나도 아이들에게 다양한 기회와 토론을 열어주고 싶지만, 막상 회의를 시작해보면 예상했던 대로 그러려니 했던 의견이 나오거나 아이들은 교사가 은연중에 바라는 방향에 맞추어 의견을 내곤 한다.
자기 의견을 내면서도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 게 틀림없다. 그러니 회의라는 게 재미가 있을 리 없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몰래 그림을 그리거나, 딴 짓을 하는 아이들도 많기 마련이다.
그러던 것이 지난번 회의 때는 열띠게 토론이 벌어졌다. 우리반 전체가 4월 말에 서울시국학기공대회에 나가서 2위를 하면서 받은 대회 상금 때문이었다. 이 상금을 어떻게 쓸 것이냐가 토론의 주제였다.
안 그래도 상금을 받자마자 당장 먹으러 가자는 아이들이 있어서 진정시키느라 회의시간에 의논해서 결정하자고 간신히 미루어 두었으니, 때는 이때다 하고 저마다 상금을 어떻게 쓸 지에 한 마디씩 하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모처럼 탄 상금이니 다 좋은 일에 기부합시다.”
“그래도 우리가 애써 받은 건데 5만원은 다 같이 뭐 사먹고, 5만원만 기부합시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실컷 먹읍시다.”
“상금이라고 그렇게 돈을 마구 쓰면 안됩니다.” 와글와글...
“만약 피자를 사 먹는다면 5000원에 한 판 하는 피자를 6모둠이 먹으면 3만원이면 됩니다. 그렇게 합시다.”
“나는 피자를 못 먹습니다.”
“그럼 못 먹는 사람은 다른 것을 사 주면 됩니다.”와글와글...
“그럼 팝콘치킨으로 하지요, 그럼 2000원씩 48000원이면 됩니다.”
한 시간 가까이 모두 한 마디씩 해댔으니 진행하는 회장도, 의견을 내려고 기다리던 아이들도 진이 빠져가고 이러다가 아무것도 결론이 나지 않겠다 싶을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점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자신들이 이렇게 떠들어대고 배가 산으로 가는 모양이 되었는데 왜 선생님은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가 싶어서인지 ‘선생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라는 표정으로 자꾸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이 늘어갔다.
“얘들아, 선생님에게 결정을 내려달라고 기대하지마라. 선생님은 어떤 결정이든 너희들이 내린 선택을 따를 거야. 그러니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부 너희들의 책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 함께 의견을 모아보렴. 너희들을 믿는다.”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 솔직히 나도 불안한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것에 책임지는 것을 배우려면 조금 모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면 아이들이 분명히 좋은 선택을 할 거라는 나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회의는 결국 그 날에 결론을 못 내고 다음 날로 넘겨졌다. 그런데 과연 아이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아이들은 상금의 반은 모두가 행복하게 먹을 것을 사서 잔치를 하고, 나머지 반은 좋은 일에 기부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또 수많은 말들이 오고갔지만 결국 손쉬운 피자를 모둠별로 시켜 학급잔치를 했다. 피자를 못 먹는다고 한 아이에겐 양해를 구했다. 또 좋은 일에 쓰기로 한 돈은 연말에 불우이웃돕기로 쓰기로 하고.
이번 일이 중요했던 것은 결론이 어떻게 내려졌는가보다는 서로의 생각을 주장하고 조절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진짜 중요한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 아이들은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책임 또한 선택한 사람의 몫이라는 걸 배워가는 것이다.
학원도, 공부도, 자유시간도 부모님의 계획대로 짜여지는 경우가 더 많아 선택보다는 강요가 몸에 밴 우리 아이들은 이젠 선택의 기회가 오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하고, 어렵다고 느낀다.
처음부터 옳은 선택, 좋은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걸 배우면서 아이들이 제대로 어른스러워진다고 믿는다. 어떤 선택이든 그것에 책임을 지는 걸 연습하다보면 점점 무엇이 나에게, 모두에게 좋은 선택인지를 배우게 될테니 말이다. 물론 이렇게 아이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려면 우리 어른들에게도 정말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기는 하다.
글. 김진희
올해로 교직경력 18년차 교사입니다. 고3시절 장래희망에 교사라고 쓰기 싫어 '존경받는 교사'라고 굳이 적어넣었던 것이 얼마나 거대한 일이었는지를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