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도 채워도 허전한 마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기분.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이 불편한 느낌의 실체는 무엇일까?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마이클 이스터는 그 답을 찾아 인간 진화적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우리가 느끼는 결핍감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자원이 부족하던 시기에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결핍의 뇌'가 자원이 넘쳐나는 오늘날 환경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작동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결핍을 채우려는 뇌의 진화적 본능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더 자주, 더 빠르게 갈구하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장기적인 성장과 만족 대신 순간적인 위안을 좇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러한 뇌의 취약점을 교묘히 이용해 소비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가짜 결핍》은 저자가 진화심리학, 뇌과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결핍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탐사 저널리즘의 정수다. 2년간 6400킬로미터를 탐험하며 그 여정에서 인간 뇌의 진화적 한계와 현대사회의 정교한 유혹이 만들어 낸 악순환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자기 파괴의 고리를 끊고 진정한 삶의 충만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더 많이'의 저주,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레고로 다리를 만들고 있던 공학 박사 클로츠는 구조물이 불안정해지자 본능적으로 블록을 추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들 에즈라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손쉽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저 블록 몇 개를 뺀 것이다. 다리는 기울기가 평평해지면서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빼낸 블록들을 활용해 레고 도시를 더 세울 수 있었다.
클로츠는 이때의 깨달음 이후 몇 건의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레고로 만든 플랫폼을 안정화하거나, 미니어처 골프 코스를 개선하거나, 관광 일정을 수정하라는 등의 요청을 받았는데, 이때 요소를 더하거나 뺄 수 있었다. 요소를 추가할 때마다 돈을 청구한다고 미리 고지했지만, 사람들은 더하느라 바빴다. 어찌저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도 확실히 비효율적이고 값비싼 방식이었다. 빽빽한 여행 스케줄을 '더 나쁘게' 만들라는 요청에는 참가자 대다수가 일정을 '빼는' 선택을 했다.
얼핏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이 발견은 우리 뇌의 오랜 습관을 드러낸다. 더 적은 것이 더 나쁘고 비생산적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뇌에는 '더 많이'가 기본이고 '더 적게'는 거의 안중에도 없다.
생각해 보자. 몸에 해로운 걸 알면서도 초가공식품을 계속 먹고, 심각한 위험성을 짐작하면서도 마약과 도박이라는 강한 자극에 심취하고, 시간 낭비인 걸 알면서도 하루 종일 SNS를 들락날락하며 '좋아요 수'를 체크하고, 사 놓고 안 입고 안 쓰는 옷과 물건이 쌓여 있는데도 불필요한 소비를 계속한다. 우리는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점은 더 많이, 더 자주, 더 빠르게 끊임없이 채워도 허전함은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중독, 불안, 과소비, 자기 파괴적 루틴…삶을 망가뜨리는 습관의 뿌리는 결핍의 뇌에 있다!
이스터는 그 원인을 진화적 뿌리에서 찾는다. 인간의 뇌는 생존에 필수 요소였던 자원(식량, 정보, 힘, 소유물, 시간, 쾌락 등)이 희소했던 시대에 진화했다.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결핍의 뇌'로 자연스레 설계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회의 발견' '예측 불가능한 보상' '즉각적 반복 가능성'의 3요소로 이루어진 결핍의 고리(scarcity loop)라는 강력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과거 식량 탐색 행위는 도박과 비슷했다. 돌아다니면 찾긴 찾겠지만, 언제, 어디서, 얼마나 찾을지는 늘 불확실했다. 저 멀리 사냥감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기회의 발견). 이때 식량을 얻을 확률은 마구 변동한다. 막상 다가갔는데 허탕을 칠 수도 있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실한 사냥감을 얻을 수도 있다(예측 불가능한 보상). 인간은 생존 확률과 삶의 질을 높일 기회가 예측 불가능한 보상과 함께 찾아올 때까지 이런 행동을 매일, 거의 하루 종일 반복했다(즉각적 반복 가능성). 이렇게 결핍의 고리에 빠지는 방향으로 행동을 강화해 온 것이다.
자원이 풍족해진 것을 넘어 과잉된 오늘날에도 결핍을 채우려는 우리 뇌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그대로다. 오래전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든 행동 양식이 이제는 삶을 망가뜨리는 나쁜 습관을 형성하는 비밀 트리거가 된 셈이다. 이 비밀 트리거는 어찌나 강력한지, 멀쩡한 비둘기도 도박꾼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심리학 박사 토마스 젠탈의 실험에서 비둘기는 불빛을 쪼면 두 번에 한 번, 즉 50퍼센트를 보상받는 첫 번째 게임과 불빛을 다섯 번 쫄 때마다 한 번, 즉 20퍼센트를 보상으로 받는 두 번째 게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두 번째 게임은 보상이 간식 20개로 첫 번째 게임(15개)보다 더 많았지만, 보상을 언제 받을 수 있을지는 예측 불가능했다.
최적 섭식 이론에 따르면, 동물은 어떻게 해서든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식량을 얻으려 애쓴다. 그런 면에서 더 많은 간식이 보장된 첫 번째 게임을 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불과 몇 라운드만에 비둘기들은 보상받을 확률이 낮은 도박성 게임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무려 96.9퍼센트였다. 똑같은 현상은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관찰되었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사실은, 보통 작은 새장에 두는 이 비둘기들을 야생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게 한 다음, 다시 같은 실험을 진행했더니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박 요소가 없는 첫 번째 게임을 골랐다.
최적 자극 모델에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자신이 선호하는 자극 수준이 있는데, 자극이 이보다 낮아지면 추가로 자극을 찾는다고 한다. 비둘기는 야생의 삶에서 접할 법한 형태의 대체 자극을 받았기에 도박성 게임을 선택할 가능성이 줄어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풍요로운 지금, 자원을 얻는 일은 너무 쉬워져 버렸다. 더 이상 예전처럼 바깥에 나가 식량을 탐색하기 위해 시간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자극이 부족한 채로 새장 속에서 살아가는 비둘기처럼, 우리도 자극이 부족한 삶을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소비 행위로 채우려고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결핍의 고리는 어디에나 있다" 보이지 않는 설계자들
욕망하는 대상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다음 대상을 욕망하는 행위는 그저 욕심 많은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의 뇌가 무엇에 약한지 너무나 잘 아는 기업들은 이 결핍의 고리를 마치 성공 공식처럼 활용하여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한다.
저자는 슬롯머신 디자이너, 게임 및 자동 재생 기능 개발자, 건강 추적기 제작자 등 실제 이 설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메일, 뉴스 피드 알고리즘까지 탐사한다. 그만큼 결핍의 고리는 정말 주변 어디에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켜 보면 된다. 넷플릭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틴더, 테무, 알리…. '한 번 더' '조금만 더' '이것만 하면 끝' 이렇게 끊임없이 속삭이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투성이다.(정재승 해제) 결핍의 고리로 가득한 지뢰밭에 안 빠지고 배기기가 더 힘든 지경이다.
결핍의 고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지면상에 밝혀지기도 전에, 눈 밝은 선동의 귀재이자 홍보 대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행동은 대중 심리와 사회적 습성을 이해하는 소수에 의해 지배받는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 정신의 틀이 잡히고 취향이 형성되고 생각이 주입되는 등 통제를 받는다. 대중을 꼭두각시처럼 쥐고 흔드는 건 바로 그들이다."
더 무서운 것은 첨단 기술 업계가 날로 더 정교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AI가 결핍의 고리를 더욱 강화하는 날엔 사람들은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조종당할 수 있다. 나중에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불편한 느낌을 느낄 새도 없이 그들이 설계한 완벽한 새장에 갇혀 끝없이 자극을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목적 없이 자동 재생되는 영상을 보는 동안 소중한 시간이 증발해 버리고, '좋아요' 수에 집착하는 동안 내면을 성장시켜 줄지도 모를 경험이 보여주기식 겉치레로 변모하는 이 삶이 지속된다면 말이다.
"숫자에 가려진 경험의 가치" 결핍의 고리를 끊어 내고 충분함을 되찾는 법
다행히도, 우리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강력한 결핍의 고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존재한다. 저자가 2년간 6400킬로미터를 탐험하며 만난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
제라는 꼭 필요한 것만 든 배낭 하나를 메고 연중 6개월간 사람들 발이 닿지 않는 야생에서 보낸다. 원하는 것을 바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보니 무언가가 없으면 가진 것 내에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경험에 몰입하는 법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제라에게는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배낭 속 물건들이 곧 장비였다.
"제가 가진 물건에는 전부 나름의 목적이 있고 그 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라가 물건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스터는 충동구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발견한다. 바로 '물건이 아니라 장비를 산다'는 원칙이다.
물건은 소유 자체가 목적인 소유물에 불과하다. 물건을 구매하는 건 이미 가지고 있는 소유물 목록에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다. 반면, 장비는 더 고차원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확실한 목적이 있다. 이런 접근법은 충동구매라는 결핍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구매 전에 물건이 아닌 장비를 사자고 생각하면 구매 횟수 자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제라처럼 당장 배낭 하나만 메고 야생으로 모험을 떠나라는 말이 아니다. 결핍의 고리를 끊어 내는 방법을 찾은 이들이 가진 삶의 태도에서 힌트를 얻자는 것이다. 그들은 높은 점수, 많은 돈, 여러 사람의 인정, 넘치는 정보라는 숫자에 가려진,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 즉 시간을 들여 얻은 경험의 가치를 안다는 뜻이다.
과달루페의 성모 수도원, 그곳의 20대 수도사들도 마찬가지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빠르게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자극 찾기에 몰두하는 요즘 청년들과 달리, 이곳의 젊은 수도사들은 일찍 일어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일을 하는 지극히 단조로운 루틴을 따라 생활한다.
그리고 그 무엇도 소유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채우는데도 허전한 우리와 달리 소식하고, 침묵하고, 절제하고, 노동하며 자유를 얻는다. 그들은 의미 없는 숫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몸을 움직여서 들인 시간과 노력 속에서 가치를 찾는다.
숫자에 가려진 경험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식당에 가기 전에, 영화를 보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매긴 점수부터 찾아보는 요즘 우리에겐 참 힘든 일이 되었다. 숫자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숫자라는 기준이 아닌, 살아 있는 경험을 통해 비워 내고 덜어 내면서 되레 충분함을 얻은 제라와 성모원의 20대 수도사들처럼, 생각을 자극하고 의미를 되새기고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주는 경험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명상, 자연 속 운동, 느린 독서, 공동체 활동, 뜻깊은 인간관계…… 이 모든 것은 결핍의 고리에 익숙한 우리에겐 낯설고 불편하지만, 깊은 만족을 준다. 도파민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평온은 있다.(정재승 해제)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글. 우정남 기자 insight15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