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기사 이세돌 9단

바둑 기사 이세돌 9단

반상 위의 자유

뇌2003년10월호
2013년 01월 09일 (수)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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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강인 것 같다. 누구에게도 실력이 뒤지지 않는다."

대국을 끝내고 “누가 지구상 최고수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진지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답한 스무 살의 이세돌. 이창호 9단 조차 “운이 좋아 이겼다”고 말하는 게 미덕인 바둑계에서 그의 대답은 당돌하기 그지없다. 그의 이런 점에 매료된 팬들은 인기는 월드컵 스타 김남일에, 언행은 이천수에 비유한다.


기이한 바둑 수업

세돌世乭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바둑과의 운명적 만남이 예견된다. 인간 세, 돌 돌. 이 풍진 세상에 돌로 온 천지를 지배하라는 뜻으로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다. 아마 5단의 바둑 실력에다 천문, 역사에 두루 능통했던 부친은 목포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도로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비금도飛禽島, 이름 그대로 날 짐승 많은 한가한 섬에서 아버지는 상희, 상훈, 세나, 차돌, 세돌 5남매에게 모두 바둑을 가르쳤다. 큰누나는 이미 너무 자라 바둑을 접한 시간이 짧았고, 둘째 상훈은 1990년 열 다섯 살 때 프로 기사가 되었다. 셋째 세나는 이화여대를 다니며 대학생 최강자로 활약했다. 넷째 차돌이도 바둑을 배웠으나 공부 쪽에 적성이 있어 서울 공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막내 세돌이.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는 아침마다 사활 문제를 내준 뒤 농사를 지으러 나갔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 숙제를 점검했다. 세돌은 무화과, 비파, 사과, 감, 배, 앵두, 밤 등 가을이면 과실수 40여 그루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를 먹으며, 그리고 과실수 옆으로 자리한 배추, 무우 밭에서 아버지가 바지를 걷어붙이고 작물을 돌보는 광경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기이한 바둑수업을 즐겼다. 어린 시절 바둑이 지겹지는 않았느냐고 묻자, “그냥 재미있었고, 그때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몇 년 후 이붕배라는 어린이대회에서 처음 우승했고, 서울에 올라가 있던 형 상훈이 비슷한 시기에 입단 관문을 넘었다.

큰 아들 상훈에게서 바둑계의 실정을 들은 아버지는 아홉 살짜리 철부지 세돌을 서울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형 상훈은 당시 권갑룡 6단 도장에서 사범을 맡아 그곳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세돌도 원생으로 권 도장에 맡겨졌다. 열한 살 때이던 94년부터 시험 삼아 입단 대회 출전을 시작, 95년 7월에 입단에 성공했다. 조훈현(9세), 이창호(11세)를 잇는 역대 3위 최단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런 아들의 대성을 보지 못한 채 부친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신화적 존재 이창호 움찔

입단 직후 세돌의 성적은 기대를 밑돌았다. 모두가 ‘무서운 녀석’이라고 경원했지만 막상 성적은 뛰어난 편이 못됐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오히려 성장에 방해가 된 걸까? 세돌은 처음 조훈현 9단에게 5연패를 당했다. 조 9단뿐 아니라 무명의 기사들에게도 곧잘 졌다.

“경험 부족이었죠. 경험의 유무는 산 위에 있느냐, 밑에 있느냐는 것과 비슷해요. 산 위에 있으면 돌 같은 것을 던지기 쉽잖아요. 밑에 있으면 던지기도 힘들지만 위에서 떨어지는 돌을 피하기도 어려워요. 그 차이죠.”

97년부터 그는 도약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4개 기전 본선 진출, 대왕전에서는 서봉수를 꺾고 도전자 결정전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해 봄에 세계 신기록을 하나 작성한다. 14세에 제2회 LG배 세계기왕전 국제전 사상 최연소 출전자 기록을 세운 것이다. 2002년에는 유창혁 9단을 꺾고 후지쓰배에서 우승해 생애 최초로 국제대회를 제패했고, 올해 드디어 거대한 산맥처럼 우뚝 서서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돌부처 이창호 9단을 꺾고 LG배 세계기왕전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세돌의 2대 0 리드라는 스코어보다도 바둑 내용이 더 큰 화제를 낳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1인자요, 너무도 강해 당분간 상대가 없으리라던 이창호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창호는 지난 10년 간 두려움 그 자체였다. 적어도 바둑을 아는 사람이라면 국내는 물론이고 저 멀리 중국의 변방이나 유럽까지 이창호의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신화를 뿌리부터 흔든 대결이었던 것이다. 이창호 컴플렉스에 젖어 숨도 못 쉬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고수들조차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둑에는 ‘실리’와 ‘두터움’의 두 요소가 상생상극하는데 이것은 세대교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의 일인자 계보는 조남철 9단,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으로 이어져 온다. 조남철 9단이 실리라면 김인 9단이 두터움이었고 다시 조훈현의 실리, 이창호의 두터움으로 이어진다. 이세돌은 실리 계열. 이세돌의 바둑은 날카롭고 사납다. 다가서면 베일 것 같은 날 선 긴장감과 대담하고 강한 기세가 느껴진다. 신중하며 직접 승부를 거북하게 여기는 이창호와는 정반대의 기풍을 갖고 있다. 이창호의 닉네임은 신산神算이다. 강태공처럼 낚시를 드리운 채 때를 기다리는 그의 바둑에서는 세월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인내와 끈기가 동반되는 긴 과정을 통해 수없는 묘수를 찾아내고 절묘한 반전을 이룬다. 이창호 9단이 장고해서 한 수 두면 이세돌은 즉각 응수한다. 굉장한 속기인 것이다. 

반상 위에서 서로 천적인 두 사람. 이창호인가, 이세돌인가? 과연 누가 1인자인가? 바둑계 인사들은 스스로 묻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이세돌이 이기긴 했으나, 이창호는 한 번 진 상대에게 거듭 지는 법이 없는 전략의 대가이다. 상대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그걸 반상으로 연결시키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이창호가 스승 조훈현 9단을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조훈현의 속도에 말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기사들이 속도경쟁을 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나가떨어질 때 그는 천천히 자기의 걸음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이세돌은 개의치 않는다. “앞으로 많이 이길 겁니다. 한 번 이긴 것에 불과한 걸요.”








틀 없는 자유로움


그는 바둑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정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매일 하는 게 바둑 공부인 걸요. 이제는 눈을 감고도 바둑을 둘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1년에 1백국 정도 참여하니, 일주일에 3번은 대국을 치르는 셈. 그야말로 승부의 나날이다. 바둑에 더 집중하기 위해 중학교 3학년 때 중퇴했다. 간혹 바둑이 두기 싫어지면 한강변에 나가 거닐기도 하고,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두들겨보기도 하지만, 일상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바둑판이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각은 틀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틀을 배운 바도 없고요. 한 판 한 판이 다른 상황, 다른 실전이었죠. 둘 때마다 변화를 시키자. 사실 제 스타일이 없어요. 실리파일 땐 실리파이고, 세력파일 땐 세력파고, 공격할 땐 공격을 하고. 둘 때마다 변화시키는 거죠.”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특별히 하는 훈련이 있지 않을까?“그런 건 없습니다. 세뇌를 시키죠. ‘나는 이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감이 있으면 집중력이 붙어요.”바둑을 둘 때는 정확한 계산과 감이 동시에 작용해야 한단다. 감으로 둔다 해도 어느 정도 계산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말 모르겠다 했을 때 감으로 두는데 적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입단 초기에는 생각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아 마음이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꾀가 나거나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거기에는 형 상훈의 힘이 컸다. 패한 날이면 미성년자임을 의식치 않고 서너 잔의 소주를 말없이 권하곤 했다. 패배를 삭힐 줄 알아야 끝까지 바둑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량은 소주 2병.   

“한 수 선택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는데 그게 실착이면 엄청 속상하죠. 나이가 어릴수록 실착 했을 때 감정 조절이 어려워요. 얼굴에 다 드러나죠.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감정 조절을 못하면 승부에서 밀리죠.”이젠 웬만한 실착에도 감정 조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 그리고 대회를 끝내고 나면 반드시 머릿속으로 여러 차례 복기를 한다. 그러다보면 몇 시간이 또 훌쩍 지나가고.


한 사람 앞에 4시간씩이나 제한시간을 두는 바둑대회는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형식이라며 스스럼없이 자기주장을 하는 이세돌은 당찬 N세대이다. 그러나 바둑판 앞에서만큼은 백 수 앞을 내다보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고수이다. 흑백돌과 한 호흡이 되어 타오르는 눈부신 활약이 한 때로 끝나지 않기를 많은 팬들은 지켜 볼 것이다.

글│곽문주 joojoo@powerbrain.co.kr  사진│김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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