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 내 곁에 있는 당신에게 감사를

[영화 HER] 내 곁에 있는 당신에게 감사를

서툰 남자를 안아준 슈퍼컴퓨터와의 사랑이야기

 연애에 있어 여전히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있다. ‘연애’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내게는 또 하나의 나라고 할 만큼 가깝고도 절대적이었던 한 존재가, ‘이별’이라는 단 하나의 행위로 인해 내 삶에서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에 대한 이해부족 말이다.

 영글지 못한 내 연애의 끝은 언제나 분신과도 같던 단짝과의 절교였다. 그것은 단순한 이별로 해석될 수 없었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두 사람만이 공유하던 시간과 공간이 송두리째 공중으로 사라지는 경험이다. 내 인생의 한 부분 역시 물거품처럼 없어져 버리는 상실감.

▲ 주인공 시어도어(좌)와 전부인 캐서린

 영화 ‘HER, 그녀'의 주인공 시어도어(호아킨 피닉스 분)는 그 아이러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참 많은 시간과 공간과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던 부인 캐서린과 별거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이혼 서류에 서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혼은커녕 캐서린이 없는 일상은 제 것이 아니라 잠시 남의 것을 빌린 듯이, 그저 무료하고 단조롭게, 겨우 숨만 쉬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시어도어의 마음 따위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영화는 시종일관 밝고 따뜻하고 사려 깊다. 어둠마저도 포근하게 시어도어를 감싸 안는 듯하다. 다채로운 색이 시어도어를 감싸고 또 밝히고 있지만 활기를 느낄 수는 없다. 그저 따뜻하고 포근하고 사려 깊을 뿐, 그 안에 있지만 시어도어의 마음은 너무나도 깊고도 넓게 우울감만이 자리하고 있다. 


 외로움에 사 묻히던 어느 날, 시어도어는 광고 한 편을 보게 된다. 
 “세계 최초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선보입니다.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실체죠. 단순한 운영체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의식입니다. 소개합니다. ‘OS1’”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이 원만치 않게 끝나면서 “앞으로 살면서 느끼게 될 감정을 이미 다 경험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료하게 살던 시어도어였다. 그런 그가 우연히 OS1을 설치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무척이나 유능한 ‘비서’와 고용주처럼 시작된 둘의 관계는 서로 공감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이내 ‘친구’가 된다. 직관(intuition)을 갖고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OS1은 스스로를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연기)’라 이름 짓는다. 그가 OS1에게로 다가와 ‘사만다’라 불러주자 이내 꽃을 피워내며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시어도어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 'Call from Samantha' 인공지능 슈퍼컴퓨터이자 시어도어의 연인인 '사만다'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두 사람의 연애는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는 이들처럼 '전화 통화'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영화도, 내 인생도 어릴 적 보았던 동화책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끝내버리기에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그 삶을 사는 나도 시어도어도 너무나 많은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갖고 살아간다. 시어도어와 사만다는 서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관계를 발전시키지만 결론은 있는 법.

 “정말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천천히 읽는 것일 뿐,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영원히 있을 수 없다.” 사만다는 시어도어라는 책을 끝까지 읽고 책은 덮어졌다. 

 영화는 외로운 돌싱남 시어도어와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 가득한 아가씨 사만다의, 어쩌면 흔하디흔한 사랑이야기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의식체계를 흉내 낸 프로그램의 사랑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날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만큼, 이 둘의 사랑이야기 역시 미래의 언젠가 진짜로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과 프로그램은 다르다. 제아무리 세계 최초 인공지능이라고 하더라도, 그 인공지능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몸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유한하다.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머가 설계한 대로 움직이는 '전기 신호’만이 있다. 그래서 무한할 수 있다. 끝없이 유지될 수도 있다. 시어도어와 사만다의 사랑에서 둘의 다름은 호기심과 배려, 갈등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도어와 사만다는 전혀 다른 존재인 듯하나, 관점을 달리하면 다르지 않기도 하다. 시어도어는 몸이라는 물질, 사만다는 기계라는 물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시어도어와 사만다는 모두 매순간 진화한다. 그 누구도 어제, 1시간 전의 자신과 같은 존재일 수 없다. 다만, 사만다의 속도가 시어도어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를 뿐이다. 

 지난 6월 7일 64년 만에 처음으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 슈퍼컴퓨터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영국에서 전해졌다. 이 인공지능의 이름은 ‘유진 구스트먼’. 13살짜리 인간으로 설정된 유진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했고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유진이 ‘기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유진은 직관과 자의식을 갖고 질문에 답을 했다기보다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설정된 질문에 매칭된 답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만다'가 지금 당장 내 삶 속에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의 기술적인 발전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언젠가는 등장하게 될 것이다. ‘유진’도 ‘사만다’도 넘어서는 인공지능의 등장도 불가능만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든, 지금 내 곁에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자. 물론 ‘사만다’처럼 엄청나게 똑똑하거나 섹시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저 내 곁에 온전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지는 영화다. 

글. 강만금 기자 sierra_leon@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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