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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너먼(Kahneman)과 트버스키(Tversky)는 휴리스틱heuristics 추론과 프레이밍framing 효과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해왔으며,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이론은 심리학과 경제학 분야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해 카너먼은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인지능력이 어떤 식으로 한계를 지니는지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연구는 1960년대부터 아모스 트버스키(1937~1996)와 긴밀한 협조하에 인간의 직관적인 판단력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됐다.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선호한 연구방법은 문제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예가 ‘린다 문제’이다. 먼저 피실험자들에게 ‘린다는 31세의 싱글 여성이며 활달하고 밝은 성격이다. 그녀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학창시절 사회정의와 다양한 차별 반대 운동 그리고 반핵운동에 깊이 관여했다’라는 묘사를 들려준다.
그런 다음 린다의 현재 직업과 생활을 묘사하는 8가지 리스트를 주고 선택하게 한다. 이 목록에는 초등학교 교사, 교육심리상담사 등은 물론 ‘린다는 은행원이다’라든지 ‘린다는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은행원이다’라는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피실험자들은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가능성에 순위를 매긴다. 대다수는 린다가 일반 은행원일 가능성보다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은행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명백한 오류다.
왜냐하면 그냥 수학적으로만 보아도 린다가 X라는 속성만을 가질 가능성은 X의 속성과 Y의 속성을 동시에 가질 확률보다 명백히 낮기 때문이다.
카너먼은 이 연구를 통해 대다수의 잘못된 판단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휴리스틱 추론, 즉 ‘마음의 지름길’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데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특정 휴리스틱 추론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의 속성(설명한 진실에 대한 상대적인 개연성)을 마음에 더 쉽게 떠오르는 속성(린다에 대한 묘사와 상대적인 유사성)으로 바꾸는 행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응답자들은 진실일 법한 설명을 빨리 판단하는 방편으로서 린다의 현재 활동에 최대한 근접하다고 여겨지는 설명을 선택했다.
‘린다 문제’를 통한 실험은 직관적인 판단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낸다. 즉 사람들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마음에서 일어나는 빠르고 자동적인 판단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 판단은 제어하거나 변경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마음이 연산작용을 하는 시간과 능력을 최소화해주기 때문에 그 길에 빠져들게 된다.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를 프레이밍 효과(틀 효과, Framing Effect)로 설명한다.
문제에 대한 똑같은 결정이라도 표현방법을 달리하면 이성적으로는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휴리스틱 추론과 프레이밍 효과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해오면서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이들의 이론은 심리학과 경제학 분야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카너먼은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서 런던 정경대학교에 있는 내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카너먼은 그날 자신이 만났던 베네데토 디 마르티노 박사와의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디 마르티노 박사는 근처의 뇌영상연구소 웰컴 분과(Wellcome Department of Imaging Neuroscience)에서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순간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영역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마르티노 박사는 이미 습득된 프레이밍 효과에 의해 오락가락하는 결정을 내리는 피실험자들은 감정적 처리(편도)와 관련된 뇌의 특정 부위가 고도로 활발해지며, 반면에 프레이밍 효과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피실험자들은 분석적 처리(전두엽)를 하는 뇌의 특정 영역이 고도로 활성화된다는 점을 밝혔다.
이 연구는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밝혔던 인간의 직관적 처리과정이 사려 깊은 이성적 추론보다는 서로 다른 뇌의 영역에서 관여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알렉스 버호벤 (이하 버호벤) ‘직관’이란 모호한 개념인데 이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대니얼 카너먼 (이하 카너먼) 일관성있게 정의된 용어는 아니다. 내가 그 용어를 처음으로 쓴 건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했던 연구보고서 <작은 수 법칙 The Law of small numbers>에서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작은 수 법칙이 인간 직관의 레퍼토리 영역이 아니다”라고 그 효과에 대해 썼다.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는, ‘직관’이란 특정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인 판단을 만들어내는 기준이 객관적인 관찰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반화된 서술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그 사실을 거부하더라도 외부 관찰자에 의해 정확하게 묘사될 수 있다. 나는 그 용어를 ‘직관 시스템’이라고 표현해왔다. 직관적인 사고라고 불리는 생각을 생성해내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 시스템의 운용은 자동적이고, 빠르고, 연상에 의한 것이며, 감정적일 때가 많다. 우리는 대개 자기성찰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지 못하며, 자신을 제어하거나 자신의 결정을 바꾸기 어려워한다.
직관적 시스템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금방 떠오르는 느낌을 생성한다. 직관적 시스템은 이성적 사유체계와는 매우 다르며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 이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게 직관적 판단이다.
버호벤 당신이 직관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직관적 시스템의 결과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도덕적 이론을 세우고 실험하기 위한 문제 판단의 유형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신과 철학자 모두 ‘직관’이라는 말을 쓴다.
철학자들은 문제 판단에 대해 사유할 때 직관이라는 말을 쓴다. 반면에 당신이 쓰는 직관적 판단이라는 범주에는 그런 확장적인 숙고의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 판단에 이르는 숙고의 수단이 직관이라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카너먼 글쎄, 심리학자들의 방법론과 철학자들의 방법론을 비교하는 건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지 알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한다.
심리학적 분석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인간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 대해 처음에 직관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 그 직관을 왜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떠오른 그 이야기가 반드시 직관의 이유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을 일으키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의식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라고 믿는다. 그리고 대체로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실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닌 이야기로 문제를 만들어내기는 매우 쉽다는 것이다.
좀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다. 최면 후 암시에 대한 실험이 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내가 박수를 치면 당신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 것입니다.” 그가 깨어났을 때 당신이 박수를 치면 일어나서 창문을 열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에게 “창문을 왜 열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방이 너무 더운 것 같아서요.”
버호벤 당신이 든 최면의 예시는 너무 병리학적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카너먼 아니, 가장 훌륭한 예시를 든 것이다. 이 예시를 통해 피실험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피실험자들은 지침이 주어졌기 때문에 행동할 뿐이며, 누군가가 손뼉을 쳤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최면 후 암시에 의해 완전히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지만, 자신이 창문을 열 때는 납득할 만한 이유에 의해 행동한다.
내가 여기에서 끌어낸 결론은 우리가 직관적 판단을 납득하는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 직관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식활동이라는 점이다.
버호벤 그러나 여전히 최면의 예시에서는 우리가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 그 행위를 왜 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 예시에서는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방법론에 대해 말하자면, 철학자들은 독립적인 사건에서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견인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판단에 대해 더욱 쉽게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이런 수단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특정한 경우에 내린 결정이 다른 경우에서도 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카너먼 그러나 이 경우에는 또 다른 방법론적 문제가 있다. 나는 그것을 ‘피실험자 내(within-subject)’와 ‘피실험자 간(between-subject)’이라고 사고방법을 나누었다.
‘피실험자 내’ 방법은 피실험자가 복합적인 갈등 문제에 대해 사고할 때 복합적인 경우와 비교해보는 것이다. ‘피실험자 간’ 방법은 다른 경우와 명백한 비교를 하지 않는다. 두 가지 방법은 문제의 사고에 대한 아주 다른 통찰을 보여준다.
도덕철학에서는 본질상 피실험자 내의 방법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다. 즉 도덕철학자들은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경우를 생각하고 그 사이의 차이를 찾으며 이 차이들이 피실험자들의 반응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덕주의자들의 한계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한 번에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며, 그들이 관련한 직관은 한 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철학자들은 개인에게 적절한 도덕적 본능을 정의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므로 피실험자 간 접근을 통해 한 가지 경우의 그룹에게 해당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또 다른 경우의 그룹에게 해당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버호벤 매우 흥미로운 얘기다. 두 가지 방법론이 어떤 다른 판단을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다른 예시를 들어줄 수는 없을까?
카너먼 카스 선스테인Cass Sunstein, 데이비드 샤케이드David Schkade 그리고 일리나 리토브Ilana Ritov와 함께 했던 연구가 좋은 예다. 우리는 상해범죄를 동반한 비즈니스 사기를 단순 상해범죄나 비즈니스 사기 단독으로 떼어놓고 보았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처벌 정도에 대해 연구했다.
비즈니스 사기만 단독으로 놓고 볼 때는 무조건 다른 비즈니스 사기와 비교한다. 그러나 비즈니스 사기를 다른 범주와 함께 묶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상해와 같은 범법행위와 비교하면 단독으로 볼 때와 처벌이 다르다. 상해는 일반적으로 사기보다 더 나쁘다고 여기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사기는 더 가벼운 범죄로 느낀다.
버호벤 당신의 이야기는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실험자 내의 방법이 오히려 정당하다고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각각의 경우를 독립적으로 놓고 생각해야 한다면, 실험자 간 방법으로 접근하여 복합적인 경우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야 그 사람의 실수를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카너먼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 보고서에서 나는 실험자 내 비교법도 장점이 있다는 점에 대해 주장하고자 노력했다. 단일 사건을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일관적인 세계관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나은 청사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정책이나 도덕률에 대해 생각할 때, 실험자 간 방법에서 실험 참가자들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두 가지 경우를 비교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일관성에 대한 요구와 사람들의 판단을 침해하는 원칙을 강요해야 하는 요구 사이에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보고서에서 도달한 결론은 양쪽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추천하는 것은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건을 독립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배심원들이 그렇게 하듯 분노를 개입시켜 처벌의 엄중성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버호벤 우리 직관이 반응에 따라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예를 들 수 있는가?
카너먼 도덕철학자들이 곧잘 인용하는 ‘트롤리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레버를 당기지 않으면 달리는 트롤리 열차에 다섯 사람이 죽고, 당기면 궤도가 바뀌어 한 사람만 죽는 상황의 딜레마다.
어떤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레버를 당겨서 열차의 궤도를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허용 가능하다고 믿는다.
당신이 한 구경꾼을 밀어서 열차에 부딪히게 하지 않으면 다섯 명이 죽는다고 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그 사람을 열차 쪽으로 미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궤도를 이탈시키지 않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열차 정면으로 밀어넣어 열차를 막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버호벤 일반적인 원칙들과 일치하는 강한 직관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보다 일반적인 정의감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확신하는가?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고 다섯 사람을 구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에 비춘다고 해도, 한 사람을 열차 정면으로 밀어넣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직관적 판단을 수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인가?
카너먼 그렇다. 나는 내적으로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관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나는 일관성이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어떤 도덕적 딜레마는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트롤리 열차를 이탈시켜 다섯 사람을 살리는 경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납득할 만한 규칙이 없을 수도 있지만 납득할 만한 규칙이나 다른 직관에 의해 갈등을 일으킬 때 버려진다.
납득할 만한 규칙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강력한 직관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갈등을 일으키는 규칙이나 직관에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납득할 만한 규칙에 의해 구경꾼을 밀어서는 안 된다는 직관이 생성되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또한 어떤 사람도 그런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믿는다. 사실 나는 그 구경꾼을 미는 일이 진심으로 혐오스럽게 여겨진다.
이 지점에 직관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들어 있다. 나는 일관성을 추구하는 일이 칭찬할 만하며 꾸준히 추구해야 한다고 믿지만, 동시에 그 행위가 결국에는 실패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알렉스 버호벤 Alex Verhooven | 번역·구승준
이 기사는 국제뇌교육협회(IBREA)가 발행하는 영문 계간지 <Brain World>와
기사 제휴를 통해 본지에 게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