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정윤철 | 출연 천호진,문희경,유아인,황보라,김혜수 | 2007년 | 114분
창의력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게 가장 익숙한 존재들은 누구일까? 휙휙 둘러본다. 소파 위에서 시체놀이를 하는 이, 컴퓨터에 얼굴을 붙인 이들이 눈에 띈다. 가족이다. 이 영화는 이 익숙하다 못해 가끔 존재 자체를 잊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스터리 보고서이다.
영화 속 가족은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지리 공부 못하는 아들과 딸, 아무리 봐도 무 매력인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만 떼어내면 언뜻 보기엔 대한민국의 67%는 그러할 듯 보이는 이 가족. 이들의 미스터리들 중 가장 풀기 쉬운 듯하면서도 가장 많은 가지치기 추리가 필요한 미스터리는 이 영화의 숨은 주연인 어머니의 일상에 포진해 있다.
슈퍼맨 밥통
어머니의 미스터리는 터져버린 낡은 밥통으로부터 시작된다. 무릎 인대 파열로 입원한 어머니의 부재로 몸체와 뚜껑이 분리된 고장 난 밥통(분리된 가족의 일상을 닮았다)을 맡게 된 이모는 그 밥통으로 항상 언니에게 받았던 밥그릇을 떠올리며 밥 짓기에 돌입한다.
째깍거리는 소리 속에 김이 뿜어져 나오던 밥통 뚜껑은 폭발음과 함께 천장을 향해 나른다. 함께 날린 하얀 밥알들. 어머니의 존재적 폭발처럼 터져버린 밥알들이 집 안을 사정없이 난다.
그 순간 어머니는 가족 하나 찾지 않는 입원실에서 한 청년의 문병을 받는다. 동네 청년의 손엔 꽃다발과 향 좋은 원두커피가 들려 있다. 청년의 미소 앞에 어머니는 순간, 소녀가 된다. 그런 어머니에게 찾아온 첫 가족이 밥통 든 이모다. 가족의 염려를 전한다기보다, 밥통의 비밀을 풀기 위한 이 짧은 방문은 가족에게 어머니가 지닌 존재의 무게를 가벼운 밥통의 무게로 환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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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조리의 위대한 발견
목발 짚고 혼자서 퇴원해 돌아온 어머니의 귀환. 이후 주방엔 커피 향(어머니의 심리적 변화를 상징한다)이 풍기기 시작한다. 해진 옷만 입는 그녀에게 커피메이커가 있어서가 아니다. 어머니의 커피메이커를 들여다볼까?
머그 컵 위에 쌀조리, 조리 위에 티슈 그리고 티슈 위에 간 원두, 마지막으로 부어내리는 뜨거운 물. 대단한 커피다. 어머니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발상의 부산물이다. 이 영화의 미학은 이런 사소한 디테일의 섬세함에 있다. 그 섬세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실의 힘이란 과연 위대하다.
‘스승의 날 기념’이라고 찍힌 이 빠진 머그 컵에 담긴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며, 어머니는 청년이 쥐어준 책의 한 구절을 읽는다. ‘커피향이 내 몸에 들어와서 열정이 되죠.’ 그런데, 커피가 위장에 도달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공간을 침범하는 이가 있다. “노크 좀 해 이년아!”라고 외치는 어머니에게 “주방에 노크하고 들어가는 년 있나?” 하는 이모의 답. 의미를 놓치기 쉬운 이 장면은 집의 주인인 듯 보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음미할 공간조차 없는 어머니의 공간을 대변한다.
어머니의 짧은 로맨스는 “내일 시간 되세요?”라는 청년의 전화와 함께 황홀히 시작되었다가 다단계 최신형 커피메이커로 끝이 나지만 그날 이후 어머니의 밥상 위엔 밥그릇과 이 빠진 컵들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줄줄이 식구 수만큼 커피를 담게 된다. “언니는 그렇게 커피가 먹고 싶었어?”라고 묻는 이모에게 “그렇지 뭐…”라고 답하는 어머니.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커피가 아닌 열정이라는 것, 커피는 그녀가 잃어버렸던 감성의 상징적 대상이라는 것을 가족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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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밥상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에 잠시 머릿결을 날려준 짧은 사랑의 도파민 세례는 잘못 읽은 한 청년의 눈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머니가 감지한 뇌의 주파수는 잃어버렸던 감성지수를 충전시켜 대뇌변연계의 활동을 돕기에 충분했다. 아직 내 안에 뭉클거리는 열정이 있다는 것, 아직도 하얗고 붉은 원피스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최신형 커피메이커의 MP3 기능과 보조 배터리 기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 남편을 위해 소리 지르고 싸워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세트로 된 예쁜 잔을 가족의 상 위에 올릴 수 있다는 것….
가족에게 아직도 어머니의 “엄마는 말이다…”의 발언이 돌아온 가출 똥개 ‘용구’의 짖음보다 못할지라도, 어머니의 상 위엔 가족 수만큼의 회충약이 올라올 것이고 ‘Easy life’라고 써진 낡은 밥통의 밥은 맛있게 익어갈 것이다.
이 글에서 풀어낸 미스터리는 어머니의 낡은 밥통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영화에서 당신이 찾아낼 수 있는 이 가족의 미스터리는 무궁무진하다.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비유와 상징과 수수께끼를 온통 품고 있는 이 영화에 창의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하나하나 헤쳐 나가보자. 갈수록 더 삼삼한 맛이 느껴질 것이다.
“달은 우리에게 뒷면을 보여주지 않는데”라는 딸의 말처럼, 내 가족도 그들만의 미스터리한 세계를 우리에게 다 보여주지 못한다. 그저 저마다 가슴속에 혹은 두뇌 속에 서로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대하고, 인정하고, 한편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족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를 직접 생생히 들여다보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뇌가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듯이 가족은 나의 일부로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있어 우리의 삶은 힘겨워도, 고달파도 외롭지는 않다.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글·최유리 yuri2u@brai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