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다는 슬픔보다 잊어야 한다는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우리에겐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것, 잊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두뇌의 알쏭달쏭한 변덕일까, 마음의 작용일까. 일상생활에 흔히 일어나는 건망증을 비롯한 기억장애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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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말하면 기억이란 ‘뇌 속에 저장된 정보’를 의미한다. 기억은 현재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과거 경험과 대조해 봄으로써 새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 기억이 있음으로 성공적인 것은 계속 발전시키고,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 특히 고등동물일수록 기억기능이 다양하게 발달했다. 물론 인간은 기억기능이 가장 고차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한편 인간이기 때문에 경험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한 나머지, 기억에도 특수한 장애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당시의 기억이 더욱 생생해질 수도 있으나, 반대로 기억상실이 유발되기도 한다. 상상에 의한 기억 착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반응은 동물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억은 뇌의 기능이다. 그래서 인간의 뇌에는 해마, 유두체, 시상하부 등 변연계의 구조가 있어 기억에 관여한다. 기억은 단기적으로는 신경회로의 활동으로 저장되지만, 특히 중요한 기억은 단백질의 형태로 장기간 보존된다. 이런 단백질의 합성은 유전물질인 핵산에 의해 일어나므로, 결국 중요한 기억은 유전된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젖빨기, 웃음, 분노 등 중요한 행동양식은 배우지 않아도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다. 유전에 의한 인류 공통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몇 가지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 첫째는 정보의 입력과 등록이고, 다음은 정보의 저장, 그 다음은 정보의 회상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기억장애가 온다. ‘오늘 아침식사 때 반찬이 뭐더라?’ 하는 것은 단기기억이다. 단기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어떤 정보가 오래 기억되려면 반복을 통해 저장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암기과목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는 반복 암기가 중요하다. 자신의 이름, 부모 얼굴, 고향 마을 모습 등은 반복적 기억을 하다보니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 이를 장기기억이라 한다.
지우고 싶은 기억만 잊는다
기억장애는 그 원인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기억을 못하는 원인이 마음에서 온 심인성 기억장애와 뇌손상에 기인한 기억장애가 그것이다.
기억상실 상태 또는 건망증이 생겼으면 하고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건망증에는 정신적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다.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잊혀지는 것이다. 불안이나 공포, 분노나 수치심, 죄의식 등이 동반됐던 경험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한다. 흔히 피곤해서, 생각이 복잡해서 등의 이유를 대지만, 사실상 그 원인은 감정에 기인한다. 무의식적으로 ‘억압’이라는 정신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인성 기억상실은 선택적으로 기억을 상실한다. 잊고 싶은 것만 잊는다. 경험을 이미 했기 때문에 관련 정보가 뇌에 등록되어 있으나, 감정이 회상을 막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기억상실은 갑자기 오고, 다시 기억이 나기도 하는데, 대개 갑자기 그리고 거의 완전히 기억을 되살린다. 뇌기능은 정상이므로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는 능력은 남아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기억상실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억상실은 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과 관계되기 때문에 대개 자신의 신분, 과거 배경 등을 잊어버리기 쉽다. 즉 이름, 신분, 집, 부모, 고향 등 먼 과거 어릴 때의 기억이 주로 상실되는 것이다. 또한 일정기간의 일만 잊는 수가 있는데,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의 일이 통 기억에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다른 때 일은 잘 기억하고 의식은 명료하며, 일상생활은 잘 해나갈 수 있다. 부부싸움 후 부인이 정신이 멍하고 자기 이름도 모르고 남편도 자식도 못 알아보지만, 친정 부모는 알아보거나 여기가 어느 병원인지는 알고, 지하철을 타거나 돈 계산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경우가 있다. 즉 머리 속에서 지우고 싶은 기억만 지워버린 것이다.
드물지만 환자에 따라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기억상실이 와서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운 이름과 직업, 가정 그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극적인 경우도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은 이중인격도 심인성 기억장애에 해당한다.
부정적 감정 해소해야 건망증 없어져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심인성 기억장애는 대단히 흔하다. 너무 바쁘고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도 건망증이 올 수 있다. 친구 이름이 깜박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물건을 두고 내린다거나, 무엇을 어디 두었는지, 약속시간 심지어 자기집 전화번호까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나중에 갑자기 생각이 난다. 신경 쓸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은 대개 감정 문제다. 아무리 복잡한 일이 많고 육체가 피곤하더라도, 마음이 안정되어 있으면 건망증이 적은 법이다.
치료와 예방을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무의식적인 부정적 감정을 해소해야 한다. 뇌의 기억능력은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최상의 기능을 발휘한다. 경우에 따라 정서적 안정을 위한 휴식, 여행, 스포츠 등이 좋은 방법이며, 심한 경우 정신과 상담치료을 받을 수도 있다. 의사에 따라 적절한 약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때에는 반드시 전문가와 의논해야 한다.
뇌 손상에 의한 기억장애
뇌의 손상에 의해 현재의 기억하는 능력을 상실한 경우 그 이유는 다양하다. 뇌에 외상을 입거나, 뇌종양, 저산소증 또는 소위 중풍이나 뇌출혈 같은 뇌혈관장애 등이 원인이 된다. 가장 흔한 것은 음주와 음주에 의한 비타민(특히 치아민)의 결핍증이다. 몸이 피곤하면 아무래도 뇌기능이 저하된다. 이 또한 건망증의 원인이 된다.
노인이 되면 뇌가 노화하여 용량도 줄어들고 기능이 감퇴하기 때문에 건망증이 생긴다. 특히 일찍부터 노인에게 기억상실과 정신기능의 퇴화가 심해지는 증상을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 병이라 한다. 이는 기억상실뿐 아니라 감정장애나 실어증 등이 수반되기도 한다.
뇌손상의 경우 급성 신경과적 치료 후 재활치료가 이어진다. 뇌손상 정도가 약하면 회복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 손상되지 않은 뇌 부분이 기능을 대신하여 회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뇌손상이 심하면 기억상실은 영구적이 된다. 따라서 예방이 중요하다. 특히 음주나 과로를 삼가고, 위생과 영양을 잘 챙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민성길 skmin518@yumc.yonsei.ac.kr
연세의대 정신과 교수. 대한 정신약물학회 회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 역임. 저서로는 〈최신정신의학〉,〈임상정신약리학〉,〈WHO 삶의 질 척도 지침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