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지능 주창자 하워드 가드너 인터뷰
“현재의 교육 처방, 완전히 잘못됐다”
지난 20세기 동안 미국의 교육계는 소위 IQ에 대한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립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IQ 검사를 했던 때와 그 점수까지 기억할 것이다(우리 학교는 물론 그 결과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선생님의 책상에 가서 각자의 점수를 확인했다). 뇌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처럼 뇌의 가소성(자극에 의해 변화하는 성질)을 규명하기 이전에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 고정돼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IQ를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지능에 순위가 있다는 개념은 효율적이고 잘 정비된 교육 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혹은 그렇지 않은지) 알게 된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개념이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단일한 시각은 오직 한 개의 정답만 존재하는 획일적인 시험으로 학생과 학교의 발전을 측정하도록 조장한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지능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뇌 손상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예술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뇌가 얼마든지 탁월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밝혀냈다. 1983년 출간된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마음의 틀: 다중지능(Frames of Mind: The Multiple Intelligences)》에서 가드너는 일곱 가지 지능을 제시했다.
음악 지능, 신체 지능, 논리수학 지능, 공간 지능, 언어 지능, 인간친화 지능, 자기성찰 지능이 그것이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새로운 개념은 교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점차 널리 받아들여져 오늘날에는 지적 능력이 획일적이거나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거의 상식으로 여기게 되었다. 가드너는 IQ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기 위해 그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천편일률적인 시험과 단순 암기 위주의 교육 방식, IQ가 주도하는 현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최초로 다중지능 개념을 제안한 지 25년이 지나서도 가드너는 자신의 이론을 계속 발전시켜왔고, 몇몇 사립학교에서는 그가 제안한 교육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No Child Left Behind’(뒤떨어지는 학생이 없게 하자는 부시 정권의 공교육 개혁 프로그램. 학생들의 평균 성적을 개선하기 위해 시험을 통해 각 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해 결과를 발표함) 정책으로 인해 표준화된 시험이 공교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드너 교수가 요즘 다중지능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만났다.
바로 얼마 전에 존 메디나 박사(《브레인 룰스Brain Rules》 저자)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당신의 이론이 상당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지?
내가 오해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종종 피상적으로 해석된다는 건 알고 있다. 나는 심리학자다. 다중지능 이론은 심리학에서 널리 알려진 단일한 지능 시각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발전된 것이다. 나는 내 이론이 심리학 분야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교육계에서 내 이론이 좀 더 널리 알려졌고 꽤 유명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내 책을 직접 읽은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그들은 내 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지능이 다원적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다면 그것 자체는 괜찮다. 하지만 내가 구체적인 교육제도를 제안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다. 내가 널리 오해받고 있다고 돌려 말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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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다중지능의 이론과 실제(Multiple Intelligences : The Theory in Practice)》에서 특정한 지능 위주로 교육을 계발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다면?
교육은 개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학생이 똑같이 마쳐야 할 교과과정이 있다고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잘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만일 신체 지능이 매우 발달한 학생이 논리 지능과 언어 지능만 중요하게 평가하는 학교에 배치된다면 그 학생의 자존감은 낮아질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는데도 그 능력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물론 신체 지능이란 축구를 하는 것부터 외과 수술을 하는 것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를 포함한다.
내 책 《훈련된 마음(The Disciplined Mind)》에서 꽤 많은 양을 할애한 부분이 사람들의 장점을 전통적 교과과정에 들어가는 일종의 진입 지점으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신체 지능을 물리학에 관한 것들을 이해하는 데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교과서나 강의에서 모든 것을 다 학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책에서 당신은 그런 방법을 은유적 학습 방식이라고 지적하면서 진정한 학습을 위해서 학생들은 물리학 혹은 수학 공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좋은 지적이다. 내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방식은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자가 하는 식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그러나 지렛대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이해하고 싶다고 해서 물리학 공식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무게와 거리와 지렛대만 알면 된다. 이와 같은 원리로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는 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
비행기 조종사 학교는 다중지능 개념에 근거해 창설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당신의 생각이 교육계에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는가?
2009년 여름 우리는 《세계의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s Around the World)》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5개국에서 42명의 필자가 각각 중국, 일본, 호주에서 이루어진 다중지능 훈련에 대해 집필했다. 25년 전 내가 발전시킨 이 개념이 세계 곳곳의 학교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나의 밈Meme(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사용한 용어로 문화의 복제 역할을 하는 단위 요소를 뜻함)으로서도 믿기 힘든 멋진 일이다.
다중지능 개념은 점차 대중화되고 있다. 예를 들면, 25년 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개념인 음악 지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늘날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 책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지능을 보는 표준화된 시각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교육자들과 교육에 대해 집필하는 작가들도 같은 의견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내가 학교 관계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나는 사상가이자 학자이며, 내가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는 가장 비중 있는 일은 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다중지능을 연구한 가장 큰 동기는 지능이 보편적이라는 통념과 IQ 검사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교육제도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들었다. 당신이 주창한 개념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한편 미국에서 ‘No Child Left Behind’ 정책과 획일적인 시험은 점점 더 많이 시행되고 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미국인은 항상 옳은 일만 한다. 그러나 모든 다른 대안들을 다 시도해본 다음에야 그렇게 한다”라는 윈스턴 처칠의 인용구를 좋아한다. 현재의 교육 처방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근시안적이지만 어쨌든 그 교육 과정을 진행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한번도 다중지능으로 다 바꾸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다양하게 탐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자는 것이다. 《세계의 다중지능》에서는 바로 그러한 일이 가장 잘 일어날 것 같은 장소와 조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장소로 미국 내에서는 어떤 곳이 적절하겠는가?
미국에서는 공립학교보다는 아무래도 사립학교에서 그런 일들을 시도할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교외 지역이나 장애 어린이와 함께 학습하는 사람들, 즉 개별적인 차이를 무시해서는 학습이 이루어지기 힘든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다.
그동안 애써 강조하진 않았지만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교육기관이 있는지?
우선 나는 결코 내가 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적이 없다. 둘째, 다중지능은 학교 운영의 핵심 사상이 될 수 없다. 학교의 핵심 교육 철학은 그곳에서 교육받은 학생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확한 교육 목표를 알아야만 우리는 다중지능이 그것의 성취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만일 교육의 목표가 획일화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이라면, 한 공동체에서 협력하면서 효과적으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의 목표와는 분명히 다르다. 목표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게 다중지능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하면 나는 먼저 미소를 짓는다. 그러곤 이렇게 묻는다. “그것 좋군요. 그런데 당신 학교의 교육 목표가 뭔지 더 궁금하네요. 학생들과 함께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지 말이죠.”
앞으로 추구할 다중지능 이론은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개념으로 함축시켜 말할 수 있다. 바로 ‘개인화’와 ‘다원화’다. 먼저 개인화는 개인이 필요로 할 때마다 언제든 그들이 학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고 편안하게 그들이 학습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개별적인 교육을 시행할 수 있는 집단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다. 개인 교사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개인화가 가능해졌다. 지난 20여 년 동안 개인적인 학습의 필요성과 가능성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다원화란 한 동전의 다른 면과 같다. 그것은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수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학, 물리학, 음악, 천문학, 심리학 등을 배울 때 반드시 한 가지 방식으로 배울 필요는 없다. 만일 다원적으로 가르친다면 두 가지 멋진 일이 생길 것이다.
첫째, 어떤 어린이는 신체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더 뛰어날 수 있으며, 또 어떤 아이는 집단에서 더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좀 더 많은 학생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둘째, 다원화는 어떤 분야를 정말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어떤 것을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것에 대해 말하거나 농담을 할 수도 있고 글을 쓰거나 도표를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다중지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교육 목표가 무엇인지, 개인화와 다원화를 통해 어떻게 그 목표를 성취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미국연합규약이나 영국의 모든 왕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에는 경제적인 소득이 적은 사람도 원하기만 한다면 그런 정보를 즉각 찾아줄 개인화된 디지털 기기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달달 외우는 건 완전한 시간 낭비다. 어떻게 배울 것인지를 학습시키는 것, 배움을 지속할 욕구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교육이 다원화되면 가르치는 일은 더욱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다원화를 위해 교사들은 대단히 유연해져야 하고, 몇 가지 서로 다른 지능을 다룰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뜻인가?
그 질문에는 좀 다른 식으로 대답하겠다. 교사가 어떤 주제에 대해 한 가지 방식으로만 가르친다면 그 주제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사에게 휘둘리지 않는 교육 방식을 만들어나가려고 한다. 우수한 교육 체계에는 대단히 전문적인 교사들이 있고, 그들의 전문성은 유연한 학습 지도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학생이 특정한 한 가지 방식에 잘 따라오지 못할 경우 교사가 “넌 정말 멍청하구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면 되겠는가.
당신의 교육 개혁 개념을 홍보하기 위해서, 다중지능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는 학교가 좀 더 인기를 얻고 더욱 확실하게 효과적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나 자신의 성향과 관련이 있다. 나는 소규모의 전문화된 고급 부티크 스타일을 선호한다. 그런 곳은 대단히 강력하고 탁월해서 사람들은 그것에 매혹당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 당신이 돕기만 한다면”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예는 지난 30년 동안 나와 함께 작업한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 시다.
그곳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환상적인 학교들이 있다. 그 학교들은 특정한 한 가지 교육 방식을 고집하지 않으며,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많은 사람들도 제한된 교육 방식을 신봉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어린이 조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식의 교육은 큰 규모로 교육 체제를 확대하는 현상과는 정반대다. 규모 확대란 누군가가 어떤 것을 잘하면 그것이 규격화되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것을 수행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런 것들이 절대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매력적인 고급 부티크를 찾을 때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정말 특별하게, 그리고 빼어나게 잘할 때 그것에서 영감을 받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직접 해보고 싶어 한다.
당신은 언어, 논리수학, 공간, 음악, 신체, 자기성찰과 인간친화 지능 등 일곱 가지로 지능을 구분했다가 15년 뒤에 자연 지능을 추가했다. 현재 고려하고 있는 다른 지능이 있는가?
실존 지능을 고려하고 있다.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지능이란 그것과 같은 종류의 신경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도덕 지능은 어떠한가?
지능이 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능이란 일종의 전산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단지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렸다. 넬슨 만델라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이 두 사람 다 사회 지능이 매우 높은 인물이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다.
밀로셰비치는 그것을 미움을 일으키고 인종 청소 같은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르는 데 썼다. 만델라는 그것으로 분리된 조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지능은 같되 쓰임새가 매우 다른 것이다. 따라서 지능 자체는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다. 그것은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도덕성이 진화를 통해 발전되어왔다는 견해가 있는데?
맞는 말이다. 물론 다른 시각들도 있다. 그래서 우호적 도덕성과 역할의 윤리성을 구분해서 소개한 것이다.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는 이웃을 알기 위해 진화했으며, 만일 우리가 이웃을 지나치게 속였을 때 우리 역시 속임을 당했다는 점, 그래서 이런 가혹한 상호성이 우리의 영장류적 유산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소위 직업에서의 윤리나 시민으로서의 윤리 같은 이웃에 대한 우호적인 본능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그 결정은 완전히 문화적인 것이다. 즉, 저널리스트나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럴 때는 영장류로서 우리가 배운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사회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역할의 윤리성과 우호적 도덕성이 우리에게 주는 암시는 무엇인가?
지난 15년 동안 나는 ‘굿워크 프로젝트’(goodworkproject.org)라는 이름으로 동료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당시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정부도 나쁘고 규칙도 나쁘지만, 시장은 좋다. 모든 것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맡겨진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시장의 수혜자이고, 내 동료들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을 기준으로 사회가 운영돼서는 절대 안 된다고 믿는다.
의료 서비스와 교육,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을 위해 사회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최근 모든 것을 시장의 흐름에만 맡겼을 때 사회 전체가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점에서 굿워크 프로젝트는 하나의 경험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다. 우리는 9개의 각기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1천5백 명의 사람들을 10년간 인터뷰해서 과연 굿워크란 무엇이며, 그것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자질을 연구, 관찰하고 있다.
굿워크란 세 가지 E, 즉 Excellence(뛰어남), Engagement(참여), Ethics(도덕성)의 조합이다. 일이란 그 일이 기술적으로 뛰어날 때, 개인적으로 참여성과 의의가 있을 때, 그리고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수행될 때 유효하다. 개인은 법을 알고 이해할 때, 그것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 이기적인 동기로 행동하지 않을 때 좋은 시민이 된다. 여기에서 시장 같은 요소는 작용하지 못한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할 때 성공사회를 창출한다고 나와 있지만, 다시 애덤 스미스로 돌아가 읽어보면 그가 의미한 사회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의미한 사회는 편협한 이기심이 없는, 시민정신을 지닌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였다.
10년 동안 우리는 훌륭한 직업인이 되는 법과 좋은 시민성을 연구했으며, 지난 5년간 나는 동료들과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렸다. 2009년 가을에 우리는 굿워크 툴킷 웹사이트(goodworktoolkit.org)를 출범시켰다. 그 사이트에 들어가면 우리가 이러한 중요한 이슈들을 가지고 전 세계와 어떻게 작업하고자 하는지 볼 수 있다.
글·앤디 헌터Andy Hunter <브레인월드Brain World> 기자
번역·안수정
cinemas87@gmail.com
* 이 인터뷰 기사는 국제뇌교육협회(IBREA)가 발행하는 영문 계간지 《Brain World》와 기사 제휴를 통해 본지에 게재함.
Q. 굿워크 프로젝트란?
굿워크 프로젝트(goodworkproject.org)는 하워드 가드너가 15년간 진행해온 프로젝트를 모아놓은 웹사이트로, 현대사회에서 훌륭하게 일하면서 좋은 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곳이다. 그들은 일이란 인간의 삶에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의 질적 수준에 의해 살거나 죽거나 혹은 상승하거나 하강하고, 희망을 가지거나 잃는다”라고 요약한다. 가드너와 동료 연구자들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와 윌리엄 데이몬은 굿워크를 “질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을 지닌 일, 사회적인 책임감과 의미를 지니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 프로젝트는 개인의 일이 ‘탁월한지’ 혹은 ‘타협적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군을 조사한다. 그들이 찾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게 업무를 수행해내려고 하지만 이윤을 극단적인 탁월함으로 여기는 시장의 힘 같은 외부 압력에 영향을 받는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굿워크란 업무 수행이 바람직하게 되도록 하는 분명하고 강력한 기준들이 있을 때 나타난다. 그 기준은 관련된 전문 직업인 공동체에 의해 시행되어야 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자기 이미지가 내면화될 수 있어야 하며, 시장의 힘이나 정치적, 사회적 압력과 모순되지 않는 기준이어야 한다.”
이러한 메시지를 널리 알리고 훌륭한 전문 직업인이 되도록 독려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는 최근 굿워크 툴킷을 출범시켰다. 이 툴킷은 굿워크의 성취와 의미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반성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사례 연구와 활동을 포함한다. 교육 전문가들은 이 툴킷에서 교과과정을 통합하는 자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비즈니스 업체와 공공 기관들도 전문 직업인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직장인과 연계하기 위해 이 툴킷으로 세미나를 후원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툴킷은 goodworktoolkit.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