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응답하라 1997> (tvN제공)
매주 화요일 밤 tvN에서 방송되는 <응답하라 1997>은 1990년대 중반 부산을 배경으로 남녀 고등학생 6명의 이야기를 그린 복고 드라마이다. 2012년 서른세 살이 된 주인공들이 동창회에 모이면서 1997년 추억 속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렇게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 이어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현재를 사는 2030세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복고열풍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토록 복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 90년대 아름다웠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저 땐 참 행복했는데 말이야...”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vs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여자
우리는 보거나 들은 것을 본 그대로 혹은 들은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사진처럼 보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에서 핵심 요소들을 뽑아내서 그것을 머릿속에 저장한다. 그런 다음 그것을 그대로 인출하기 보다는 경험을 재창조하거나 재구성해서 인출하게 된다.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그 경험 후에 획득한 감정과 신념, 또는 지식까지 추가된다. 다시 말해 과거에 대한 기억은 사건 이후 획득한 정서나 지식에 따라 다르게 저장된다. 만약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20년대 중반 러시아의 심리학자인 알렉산드르 루리아(Aleksandr Luria)는 한 신문사의 편집장을 통해 솔로몬 셰레셰브스키(Solomon Shereshevskii)라는 기자를 소개받았다.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연설문을 전혀 필기하지 않고도 나중에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셰레셰브스키는 공감각능력이라는 기억술을 활용해 많은 것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특이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셰레셰브스키 역시 정신능력 면에서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사물을 언급할 때 서로 다른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인생사에 대해서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삶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흐릿하게 떠올릴 뿐 상세하지 기억하지 못했다.
반면 세계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 진단을 받은 미국의 질 프라이스(Jill Price)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프라이스는 열네 살 이후 벌어진 매일매일을 완벽하게 기억하며, 날짜만 대면 그날 자신이 한 일, 겪은 일을 순서대로 정확히 기억했다. 1994년 4월 27일 날씨는 어땠으며, 무엇을 먹었고, 심지어 그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언론 매체를 통해 들은 사건과 뉴스들까지 기억해 냈다.
UC어바인대학의 제인스 맥고(James McGaugh)교수는 프라이스를 5년간 심층 관찰한 결과 그녀가 전전두엽의 기능에 장애가 있음을 밝혀냈다. 전전두엽은 다른 뇌 기능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에겐 기억하는 일을 억제하는 기능이 불가능했기에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해야 했다.
프라이스는 자신의 저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에서 본인의 기억 능력에 대해 축복이자 저주라고 말했다.“언제든 그날로 돌아가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 아름다운 과거를 기억할 때는 행복하다. 그러나 친구와 싸웠던 일 하나하나, 내가 저지른 바보 같은 실수, 내가 절망에 빠졌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건 정말 괴롭다.”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할 수는 없을까?
기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간의 기억을 단기기억, 장기기억, 의미기억, 일화기억, 작업기억 등으로 다양하게 기억을 분류한다. 각각의 기억들은 특징적인 개별기능이 있으며 연구자는 이처럼 다양한 기억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뇌에 저장되는지, 일상생활에서 다른 기억들과 어떻게 조합되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질 프라이스의 독특한 능력인 자서전적 기억은 개개인의 삶에서 일어난 특정 사건에 대한 장기기억이 조합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결혼했다거나 자녀가 어렸을 때 무슨 사고를 당했다든가 하는 사실은 자서전적 기억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자서전적 기억은 매우 선택적이다. 결혼식 날이나 끔찍한 자동차 사고처럼 매우 중요하거나 정서적으로 강렬했던 사건 위주로 기억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나 스스로 편집하고 감정을 불어넣은 한 편의 영화이다. <응답하라 1997>을 보며 저 땐 참 좋았지 했지만 실제 1997년도의 나는 매일 행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드라마 상의 행복한 장면을 보며 잊고 있었던 행복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행복했던 기억만 간직하고 싶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바로 지금 행복하면 된다.
글. 전은경 기자/ hspmak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