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에 탐닉하는 특별한 이유

냄새에 탐닉하는 특별한 이유

+ 재미있는 두뇌상식

브레인 20호
2010년 12월 17일 (금) 11:49
조회수22432
인쇄 링크복사 작게 크게
복사되었습니다.


현대인은 후각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최근의 연구 보고가 눈길을 끈다. 냄새 맡는 일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일 필요가 없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고, 인간들이 그런 환경에 적응해나가고 있다는 의미일까?

그렇지만 ‘후각’은 늙지 않는 마법의 약이라도 되는 듯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지 않는가. 냄새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감각을 일깨우며, 욕구를 채워준다. 사람들은 제 몸뿐 아니라 집과 자동차, 모든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향기를 첨가한다.

후각 퇴화설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우리가 냄새에 탐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울하면 향수 사용 늘어
18세기 파리의 찌는 듯한 여름날, 생선 가판대의 악취 속에서 태어난 후각 천재 그루누이. 냄새만으로 상대의 기질과 성향까지 간파할 수 있는 경이로운 후각 능력을 타고난 그이지만 치명적인 결핍이 있다. 그에게서는 어떤 체취도 느낄 수 없다는 것.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주인공 이야기다.

그루누이에게 체취란 존재감을 의미한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의 체취에 끌렸다면, 그는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소유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터. 체취 없는 그를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는 제 몸에 뿌릴 향수를 직접 제조한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꽃, 과일, 동물의 분비물로 만든 향수를 뿌렸다. “그 누가 사용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에게 거부당하지 않을 유혹적인 향수를 만들고 싶어요.” 이는 실제 향수 만드는 일을 하는 소피아 그로즈만의 ‘이상적인 향수’에 대한 답이다. 세상에 이런 향수가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소설의 주인공 그루누이가 다시 떠오른다. 그루누이는 누군가에게 유혹적인 존재, 사랑받는 존재, 끌리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 안의 욕망을 극대화한 모습이 아닐까.

혹시 평소보다 과하게 향수를 뿌리는 날엔, 본인의 기분을 살피시길. 우울증을 일으키는 항체로 인해 후각 신경이 무뎌져 향수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리비도적인 감각, 후각  
그와 그녀가 키스를 한다. 그와 그녀는 서로의 냄새를 맡는다. 미얀마, 시베리아, 인도의 어떤 부족들에게는 ‘키스’가 ‘냄새’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로 쓰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지문을 가지고 있듯, 다른 체취를 지닌다. 부모 자식 사이든, 연인 혹은 친구 사이든, 스킨십을 통해 애착 상대의 체취를 맡는 일은 심리적인 안정감과 충족감을 안겨준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 아내나 남편이 입던 옷을 끌어안고 울거나 잠드는 행동은 공통적인 애도 반응의 하나라고 한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상대의 체취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애착 상대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을 때 느껴지는 허무함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체취를 통해 일시적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 냄새는 그 어떤 감각보다 정확하게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리하여 기억과 연관된 특정 냄새의 뇌관이 건드려지면, 추억의 영상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과거의 감정이 되새김질 된다. 이는 후각 중추가 감정의 뇌인 변연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후각은 왼쪽 뇌의 언어 중추와는 별로 연관이 없다. 그래서 냄새를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커피 냄새, 갓 지은 밥 냄새, 구수한 빵 냄새, 봄비 냄새, 헌 책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냄새, 바다 냄새,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 냄새 등을 어떤 언어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또한 원시 감각인 후각 중추는 섭식, 성행위, 노여움, 쾌감 등을 관장하는 뇌 부위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후각 기능을 상실하면 발기부전 혹은 불감증에 시달릴 수 있다. 코와 성기, 후각과 리비도 사이에는 긴밀한 영향 관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크루아상을 먹 듯 냄새의 결을 느낀다면
시각과 청각에 장애가 있었던 헬렌 켈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맡는 냄새를 켜켜이 층으로 나누어 해독하는 놀라운 후각 능력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를 이어 살아온 가족, 식물, 향수와 커튼이 남긴 여러 가지 냄새의 층을 통해 오래된 집의 냄새라는 것을 감지하는 식이다. 

최근 서울대 의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현대인은 후각 기능에 관여하는 유전자 수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1천4백여 개의 유전자 가운데 9백여 개가 작동을 중지했다는 것. 이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생존에 필수적인 다른 영역의 두뇌 활동이 더 활발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사용하지 않는 기관이 자연스레 퇴화하는 일종의 개체변이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냄새는 인간의 첫 번째 감각이었다. 신경줄 위에 있던 작은 후각 조직이 차츰 뇌로 발전한 것이다. 진정한 진화는 이 감각을 우리 생의 결을 더 풍요롭게 하는 데 활용하는 것 아닐까?   

글·곽문주yaongstar@naver.com | 일러스트레이션·이부영

ⓒ 브레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