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가 살아가는 현대의 도시에서 우리 두뇌의 가치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
앞의 말을 들으면 두뇌의 이성적 가치를 강조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정 반대다. 우리 몸과 두뇌는 현대 도시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자연물이다.
지금 자기 주변을 둘러보자. 책상 앞에 선인장이라도 있다면 그는 보다 풍부한 카오스(chaos, 혼돈)를 접하려는 사람이다. 자연이 주는 공간은 무의식의 카오스 에너지를 충전하는 배후공간이었다. 대가족 제도에서의 고모 방과 할아버지의 사랑방도 부모의 혹독한 이성적 질서의 설교로부터의 피난처였다.
필자에게 할아버지는 그런 혼돈의 ‘세이프하우스(Safe house 은신처)’였다. 필자는 비가 오면 정원의 세이프하우스인 포도나무 덩굴 밑으로 들어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잎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지를 지켜보았다. 늘 쥐약을 먹고 죽어갔던 집고양이가 배를 채우는 식당은 내가 좌식으로 앉아서 공부하는 책상 밑이었다. 쥐의 살가죽을 찢어서 고기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보다가 고양이의 식탁을 보다가 했다. 간혹 새끼를 밴 쥐는 털과 그 새끼만 책상 밑에 남겨놓기도 했다.
마루의 전기계량기 뒤에는 박쥐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고 처마 밑에는 제비가 집을 지어서 살았다. 구렁이가 제비집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며 흥부도 놀부도 되기 싫었던 우리는 제비집 밑에 새끼가 떨어져도 다시 앉을 수 있는 나무판을 고정했다. 구렁이는 흙벽으로 된 창고의 처마 밑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저 뱀은 가정을 지키는 수호자이니 잡지 말라고 했다. 비나 눈이 내리면 비가 오시네~ 눈이 오시네~ 존댓말을 했다.
필자는 카오스(혼돈)가 코스모스(질서)의 어머니인 환경에서 컸다는 것을 고맙게 느낀다. 그런데 요즘의 가정에서는 질서의 어머니가 사라지고 질서를 강요하는 코스모스 엄마만 남아있는 듯이 보인다.
15세 이전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뭔가에 깊이 몰입하면서 자연의 카오스 에너지를 자기 무의식에 축적한다. 그들을 지배하는 뇌파인 세타파는 자연의 영감을 온몸과 두뇌라는 용광로 또는 화력발전소에 저축하려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몰두하는 것들은 소위 SKY대학을 목표로 단계별로 질서 잡힌 학교의 커리큘럼과 길이 다른 경우가 훨씬 많다. 벽에 낙서를 하거나 자연체험을 하다가 다치거나 무술의 고수가 되겠다고 하거나 노래 연습에 푹 빠지거나 강아지를 키우려는 아이들은 더더욱 엄마가 생각하는 질서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코스모스의 여신이 되어버린 엄마들은 아직 어린아이의 두뇌를 가진 남편과 아이들의 카오스 에너지를 억압한다. 자신과 남편의 문예체(문학, 예술, 체육) 취미는 돈을 벌기보다는 쓰는 활동이라서 억압하고 아이의 낙서와 난잡한 장난감 놀이는 청소라는 질서를 위해서 억압하며, 다칠 수 있는 험한 환경은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피를 흘리는 경험은 코스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여기저기 다쳤던 곳에 새살이 생기는 체험은 정서적 회복 탄력성이 된다. 몸의 흉터는 사업이든 사랑이든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그런데 인간이 발달시켜온 작은 상처도 허락하지 않는 코스모스의 문명에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코스모스의 강자들이 나타났다. 바로 사물인터넷 IOT와 로봇과 스마트카를 지배할 인공지능 AI가 원래 인간의 두뇌만 가능했던 병렬분산처리를 하도록 양자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에 의해서 출시되었다. 코스모스의 여신이 되어버린 엄마들은 이제 자기 자녀들이 실업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목도해야 하는 대량실업의 시대가 비행기보다 빠른 지구의 자전 속도만큼 매일매일 다가오고 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우상인 돈을 향한 코스모스의 질서에 순응한 여신이 도시를 지배하면서 우리 주변에 남은 자연(카오스)은 이제 보도의 비둘기 똥과 파리와 모기, 베란다의 화분, 그리고 우리 몸과 두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축소되었다.
자연이 사라진 도시의 배경에는 생명의 카오스가 돈으로 이루어진 계급의 코스모스로 바뀌었다. 해가 들지 않는 북면이 그려진 오리털 잠바가 없으면 왕따를 당할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도시의 아이들은 왕따를 당하더라도 피신할 할아버지의 사랑방과 포도 덩굴이나 뒷산의 동굴이 없다. 강아지와 박쥐와 제비에게 말을 걸지도 못한다.
그래서 필자는 책에서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있는 작은 집이나 다락방을 각 가정에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공간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부모는 잔소리도 중지해야 한다. 작은 집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 하며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정서적 세이프하우스 공간은 아이들이 자기 두뇌가 가진 카오스 에너지를 유지할 배후의 넓은 상상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제 도시와 아파트에는 깊이가 얕은 작은 규모의 자연만이 존재하고 있다. 도시로 가는 누나를 보였다 말았다 하게 만들었던 구불구불 언덕길은 계단과 아스팔트로 질서를 잡았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결합한 두뇌의 창의성이 없다면 실업자가 되거나 국가의 보조금을 받으면 단순노동을 하는 사람이 된다. 필자는 SKY를 나와서 단순노동으로 연명하거나 주변에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역시 창의성과 정서지능(대인관계지능)의 결점이 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은 농어촌에서도 도시형 집에서 살아간다. 중진국 이상의 공통적 과정적 운명이지만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거대하고 깊이가 있는 자연은 자신의 두뇌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브레인’이란 브랜드를 선점한 ‘뇌교육’은 도시에 유일하게 남은 거대한 잠재적 카오스 에너지를 되찾아주는 희망이 되고 있다. 다양한 의견이 있긴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두뇌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의 힘인 카오스를 개발하는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폭포를 찾아가 바위 위에서 명상할 수 없다면, 가족이 K2의 베이스캠프까지 배낭여행을 할 수 없다면, 산속의 고수에게 무술을 배울 수 없다면, 비싼 비용이 드는 유소년 스포츠팀에 보낼 수 없다면, 유럽에 온 가족 배낭여행을 할 수 없다면, 애완동물을 10마리 이상 길러볼 수 없다면, 주말농장에서 모든 경작을 그 아이가 체험할 수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많은 시간을 자연과 보낼 수 없다면, 성적을 포기하고 아이만의 무질서적 몰입과 카오스를 존중할 자신이 없다면 엄마는 아이의 교육에서 손을 떼는 것이 더 유리하다.
카오스 에너지와의 연결이 약해진 아이는 창조성으로 이어지는 고도의 카오스모스(chaosmos, 혼돈과 질서의 합성어)를 창조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후에는 자신이 닦은 코스모스로 일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인공지능 AI 로봇의 상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의 말동무 로봇은 시인처럼 말을 하며 라면을 끓이는 로봇이 장사를 한다. 미국의 컴퓨터는 퀴즈게임에서 챔피언을 이겼다. 영국의 컴퓨터는 베테랑 의사보다 두 배나 더 정확하게 진단을 하며 수술용 로봇은 인간의 손보다 20배나 더 정교한 수술을 한다. 인공지능 의사는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수술기법을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다. 인공지능 판사는 전 세계의 판례를 1초 이내에 분석할 수 있다.
고도의 코스모스(질서)에서는 인간이 절대 AI를 능가할 수 없다. 이제 각 가정을 수호하는 코스모스의 여신(엄마)들이 다시 혼돈에서 지혜와 힘을 빌려서 부족을 지배했던 고대의 대모신大母神 ‘마그나마타(Magna Mater)’가 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1, 2, 3, 5, 8, 13, 21, 34, 55······, 피보나치 수열에 깃든 0.618과 1.618 이후에 영원히 카오스적으로 숫자가 이어지는 자연의 황금비율(golden ratio)을 가정과 교육과 사회에서 되찾아야 하는 시대이다. 자연의 감각을 잃어버린 인간은 이제 지구와 인류의 문명에서 퇴출 될 위기를 맞고 있다. 필자의 칼럼과 강의는 한국의 모든 엄마들이 다시 카오스를 이해하는 ‘마그나마타’가 되어야만 자녀의 실업을 방지할 수 있고 백수가 되더라도 행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행복한 가족이 되어야 진짜 국가적인 창조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글. 고영훈 <내 아이를 위한 두뇌사용설명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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