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그토록 무언가를 믿으려 할까?

인간은 왜 그토록 무언가를 믿으려 할까?

[브레인 셀럽] 종교와 인간 심리

브레인 99호
2023년 07월 19일 (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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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의 다양한 이슈를 ‘뇌’의 관점에서 풀어보는 브레인셀럽.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상담 코칭학을 가르치는 권수영 교수를 브레인셀럽으로 초대해 ‘종교와 인간 심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종교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을 통합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차근차근 친절하게 이끄는 그의 이야기가 끝까지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 코칭학 권수영 교수


종교 또는 종교적 인식의 시작

인간의 뇌는 삼중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에 진화한 대뇌는 관계성과 사회성에 관련한 결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최근 대뇌의 크기는 영장류가 교류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집단의 규모와 비례한다는 재미있는 연구가 있었어요. 대뇌 크기가 가장 작은 긴팔원숭이는 동료가 15마리 정도되고, 고릴라는 34마리, 침팬치는 65마리, 대뇌가 가장 큰 인간은 150명 정도라고 해요. 

대뇌는 사회적 관계뿐 아니라 자연과 우주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와의 영적인 관계를 상상하는 의식 수준까지 진화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초월적 대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특별한 의식 구조를 가진 영장류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 고유의 대뇌 신피질의 역사와 종교의 역사가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비종교는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가 화제가 되었는데, 실은 사회에 해악을 끼쳐온 신흥 종교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도 많아요. 차라리 종교의 역사와 함께 늘 성행해온 것이 사이비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970년대 말, ‘존스타운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집단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918명의 미국인이 집단 자살을 자행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죠. 

미국 출신의 교주 제임스 워렌 존스는 신도들을 데리고 남아메리카 가이아나로 떠나게 됩니다. 미국 사회와 기존의 기독교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전형이라고 비난하면서 존스타운이라고 하는 마을에 자신들만의 왕궁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했죠. 과연 존스타운에 세워진 일명 ‘인민사원 그리스도 제자회’는 지상의 작은 천국이 되었을까요. 그 반대였죠. 지독한 노동과 정신적인 학대가 자행됐고 신도의 탈출을 막기 위해 무장 경비병을 세우기도 했어요. 미국 사회에서도 이 존스 타운의 실체가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국회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내부 결속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위기를 느낀 교주 존스는 9백여 명의 신도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청산가리를 탄 음료를 마시고 집단 자살을 하고 말았죠. 이 중에는 276명의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78년 11월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사건은 지금도 가장 전형적이고 비극적인 사이비종교의 종말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고 있어요
 

▲ 게티이미지


사이비종교와 그에 따른 문제들이 계속되는 이유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사이비종교 문제가 발생하는 것 역시 인간 내면의 문제라고 볼 수 있죠. 특별히 어느 문화권이나 특정 종교에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니에요. 종교인들의 심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주셨다”, “나에게 아주 특별한 축복을 주셨다”하는. 이런 내면 심리를 심리학자들은 나르시시즘(자기애)라고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사랑한다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죠.

또 사이비종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 너만 구원의 특권을 받을 거라며 추종자를 미혹합니다. 그리고 아주 배타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죠. 공동체 밖의 사람들은 이런 특별한 구원의 테두리에 들어올 수 없고, 새로운 세상이 오면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을 거라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이런 자기애는 병리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 같은 종교 심리 연구자의 시각으로는 사이비종교의 근저에 이런 병리적인 나르시시즘의 심리가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죠.
 

사이비종교를 만드는 교주의 심리

신을 대리하는 성직자가 자신을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하는 순간 사이비종교의 수렁에 빠지는 겁니다. <나는 신이다> 다큐에서 다룬 한 교주는 신도들에게 “하나님이 안 보여? 그럼 날 봐. 내가 하나님인데 어디서 하나님을 찾아” 하죠.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보면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진단명이 있어요. 나르시시즘이 지나치게 병리적으로 드러나는 정신장애인 거죠. 그런 환자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면 대단한 자긍심이나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아요. 자기의 부적절감이나 자괴감을 철저하게 방어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자신을 확장하면서 풍선을 부는 거죠. 자신을 신이라고 선포하는 교주들이 실은 교육 수준이 미미해서 때로는 아주 무식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상처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경우가많다는 것도 이를 반증하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종교와 사이비종교의 차이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 아시죠?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끕니다. 건강한 종교는 우리 모두 선하게 창조되고 누구나 신과의 관계를 통해 거룩한 지고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요. 반면 사이비종교는 늘 과도한 나르시시즘을 강조합니다. 우리만 구원받고 우리가 믿는 방식이 유일한 최선이라고 하죠.성숙한 종교일수록 인류가 모두 신의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사회적 구원을 중시하고, 사이비종교는 정반대로 가는 거예요. 
 

▲ 게티이미지


건강한 종교가 지향하는 것

장차 올지도 모르는 여섯 번째 대멸종 시기를 지질학자들은 미리 ‘인류세’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인류세를 우리가 맞지 않으려면 미래 종교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봅니다. 종교인의 역할은 바로 모든 생명체와 자연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이웃까지 우리와 똑같은 존재임을 알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이비종교라는 것도 결국 기성종교에서 만든 내부적인 배타성은 아닌가?’ 네 맞습니다. 종교 심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편견에 대해 비교 연구를 많이 했어요. 예컨대 남녀 성차별 또는 사회적 차별, 최근에는 성 지향성에 대한 차별까지 여러 종류의 차별에 대한 이슈에 종교인과 비종교인 가운데 누가 더 포용적이고 누가 더 배타적일까요? 연구 안 해도 알 것 같죠. 연구의 결과는 늘 유사했습니다. 

종교인들이 더 포용적이고 편견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종교인들이 더 배타적인 성향을 지니는 것으로 나왔어요. 왜 그럴까요.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고 분명히 종교 경전에 쓰여 있을 텐데 왜 그 실천은 어려운 걸까요. 이런 주제 역시 종교 그 자체보다는 종교인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숙한 종교인의 태도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과 그런 믿음을 기반으로 성숙한 종교적 행동을 실천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정신 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도 똑같이 종교인들의 불안한 내면을 비판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치료하는 신경증 환자들이 자신의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스스로 만든 규칙이나 의례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점을 주목합니다. 이는 마치 종교인들이 예배나 특정한 종교적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신의 벌을 받을 거라고 믿는 공포 불안과 아주 유사하다고 본 겁니다. 

가끔 저는 상담 중에 이제 인간은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들은 부모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종교에 귀의하고 이제는 오직 신과의 관계만이 진실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신앙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겉으로 보면 어느 종교인보다 매우 강한 신앙을 가지고 종교적인 행동에 투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어떤 상태일까요. 프로이트의 시각으로 보면 이건 종교적 신앙이기보다는 자신의 불안을 보상하고 있는 강박적 행동과 다름없다는 거죠. 

순수한 종교적 행동이란 매우 자발적이고 신과의 뜨거운 친밀감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적 행동의 배후가 그저 두려움을 없애고 공포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편으로 가는 반사 행동이라면 이건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죠. 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신앙의 최고 경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숨김없이 꺼내놓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진정한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로 인한 테러와 전쟁이 여전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 

이성적인 인간이 종교적 믿음 아래에서는 매우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가 테러나 전쟁을 유발하는 무시무시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종교는 어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까요. 

종교성은 인간의 인지 발달이나 도덕 발달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존경하는 도덕 발달 이론가가 있습니다. 하버드 교육대학원에서 가르쳤던 캐롤 길리간이라고 하는 여성 심리학자입니다. 이분은 윤리학이 상대방의 감정과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배려 윤리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 분입니다. 

저는 길리간 교수의 발달 이론이 미래 종교가 나아가야 할 종교적 비전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달 이론의 첫 번째 단계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단계, 두 번째 단계는 배려를 시작하는 민족 중심적 단계, 세 번째 단계는 보편적인 배려가 가능한 세계 중심적 단계,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통합적인 우주 중심적 단계입니다. 

현재 인류가 가진 종교성의 단계는 어느 단계쯤 와 있을까요. 아마 자기중심적 단계를 넘어 겨우 민족 중심적 단계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민족 중심적 종교성의 극단적인 모습을 언급할 때 자주 이슬람 과격 단체를 꼽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교에만 이런 과격한 종교단체가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동남아시아 불교에도 스스로 버마의 빈라덴이라고 칭하면서 공격적인 테러 행위를 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일본의 선불교 스승들도 군국주의에 기반해 살인과 전쟁을 순전히 민족 중심적 관점에서 권장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래 종교의 비전은 이제 세 번째 단계에서 더 나아가 동물과 대자연까지 포함한 네 번째 단계로 진화되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운명 공동체의 암울한 미래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민족주의적 단계에 속한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에 중고 가전제품을 헐값에 팝니다. 디스카운트 해준다고 싸게 파는 대신 전혀 쓸모없는 쓰레기도 끼워 팝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때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아프리카의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과자라도 사 먹기 위해 가전제품의 전선을 모으고 그걸 녹여서 구리를 골라냅니다. 전선을 태울 때 생기는 유독가스가 아이들의 호흡기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쳐 그 지역의 아이들은 대부분 폐 질환을 달고 삽니다. 

보편적 배려가 가능한 세계 중심적 도덕성에 도달하려면 지구 반대편의 아이들도 똑같은 나의 자녀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보편적 배려를 위해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아시아, 아프리카 지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제 교세 확장이나 교회 설립만이 아니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자신보다 못 사는 개발도상국 개발 지원이라고 하는 명목 대신 지구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존과 토착민들의 자립을 위한 고등교육과 의료시설 등을 지원하는 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종교가 세계를 하나로 묶는 비전을 위해서 반드시 강조해야 할 중요한 기능이죠. 

우리가 연일 접하는 산불, 폭우, 가뭄, 폭염 같은 이상기후는 어쩌면 서구의 종교 패권주의가 그동안 자기중심적, 민족 중심적 세계관에 머물러 온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자국 중심주의와 식민 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민족 중심적 선교 정책이 이제는 지구 전체를 품는 비전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 게티이미지

종교가 심리 발달에 미치는 영향

세 살 된 아이에게 금붕어를 몇 마리 사줬는데 어느 날 배를 뒤집고 죽어 있어서 부모가 변기에 버렸답니다. 아이가 금붕어의 행방을 묻자 부모는 “금붕어가 강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변기에 넣고 방류했어” 하며 둘러댔대요. 아이는 그만 충격을 받아 화장실 양변기를 붙잡고 오열을 하더니금붕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면서 변기에 대변도 보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처럼 유아기에 생명의 비연속성을 접하면 시간과 존재의 보존 개념에 큰 장애가 발생한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발달 심리학자 데이비드 엘킨드는 이때 종교가 아주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고 설명해요. 대부분의 미국 부모들이 이럴 때 아이에게 하늘나라에 관해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죽어서 하늘나라로 가서 별이 된다고. 그리고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가라고 인사하며 아이와 함께 마당에 묻어주는 종교적 행위가 아이에게 닥친 보존 개념의 구멍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이제 학창 시절, 종교의 역할을 살펴볼까요. 청소년기쯤 되면 이제 사물의 법칙뿐 아니라 인생의 원리,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이론을 만들어간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생과 삶에는 정확한 문법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죠. 그럴 때 청소년기 아이들에게는 또다시 인지 발달에 빈틈이 생긴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에 자주 쓰는 말이 있죠. ‘아, 인생은 불공평해’,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결국 인생은 답이 없어’ 같은. 이때 종교가 다시금 이런 인지적 함정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뿐 굳이 답을 요구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유한한 인간이 정답을 내려고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그냥 신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지 한번 살아보자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연 답이 없는 종교가 인간 인지 발달에 그렇게 도움이 될까 하는 부분에 대해 저는 좀 의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이에 대해 동감하면서 무릎을 친 이야기가 있어요. 

국내 한 IT 관련 대기업에서 인문사회 분야 전공자를 선발해 창의적 기술인력으로 키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는데, 정말 군계일학의 인재를 한 명 발굴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직원의 전공이 신학인 점이 의아해서 한 임원이 어떻게 이렇게 어마무시한 창의성을 발휘하게 된 거냐고 물으니 “신학은 신이나 종교에 대해서만 배우는 줄 아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주제, 때로는 과학이나 우주에 대해서도 탐구합니다. 그런데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답이 없다는 거예요. 교수님들도 답을 몰라요. 그래서 정말 도발적인 질문도 많이 하고 토론도 많이 했어요. 그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저도 신학 전공자로서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신학은 마침표를 찍는 학문이 아니라 끝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학문이에요. 개별 종교가 수없이 많은 분파로 분열되고 타종교에 대해 심한 갈등을 조장하는 이유도 사실 너무 쉽게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찍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왜 무언가를 믿으려 할까

여러 해 전부터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줄여서 ‘SBNR’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영적이지만 그러나 종교적이지는 않다’는 뜻으로, 영적인 실천을 추구하지만 제도적인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신의 종교 지향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교회 출석이나 헌금 같은 종교 의무를 행하는 것으로 종교적 신앙을 평가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영적인 수련 방법을 찾아 명상이나 순례 등 영적인 실천을 꾸준히 해나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일컫는데,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이죠. 이들 중에는 온라인으로 종교적인 실천을 지향하는 단체에 속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정체성과는 별개로 요가나 명상,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 자기 존재의 깊이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갑자기 ‘종교’와 ‘영성’을 구별하려는 것일까요. 예전에는 영성은 종교인들만의 아주 특별한 특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SBNR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성’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가 강조됩니다. 영성은 인간 누구나 가진 초월적인 특성을 가리키죠. 인간은 태생적으로 신적 특성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는 필요 없어지고 영성만 중요한 것일까요? 

신실한 종교인이라면 구약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노아가 실제로 모든 동물들을 수컷과 암컷을 일렬로 방주에 태웠다고 문자 그대로 믿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까요. 저는 노아의 방주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들에게 가끔 농담처럼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미생물도 노아의 방주에 태웠을까요, 안 태웠을까요?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려면 미생물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중요한데 말이죠.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 속 이야기를 진짜 현실이라고 믿는 어른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종교는 여전히 아동기의 동화적인 사고, 마술적인 사고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이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어요. 즉 기독교 경전인 성경은 신의 계시를 받은 이들이 영감으로 단숨에 써 내려간 책이기 때문에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역사적 진실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문헌에 보면 아담과 이브 같은 창조 설화가 다수 발견되고 있어요. 문자적 해석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종교 공동체의 태도에 종교인들마저 답답함과 불합리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죠. 

기독교와 불교의 발전사를 보면 여전히 개인의 깨우침이나 수련을 강조하는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주류 세력은 이런 개인적인 깨우침의 전통을 경시하고 때로는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개인의 종교 생활은 갈수록 형식적인 규칙이나 종교법에 얽매이게 되고 영적인 성장은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았죠. 그리고 오직 신화적이고 문자적인 교리들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종교의 역사이죠. 이제는 종교가 신화적이고 문자적인 단계를 넘어 다양한 인간 경험을 담을 수 있도록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영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천지인 사상’은 우리가 어느 민족보다도 관계 지향적이고 또 자연 친화적일 수 있는 문화적 기초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에도 잠재적인 SBNR운동이 퍼지고 있는데, 제도적인 종교에 염증을 느끼고 반종교적인 한국인이 늘어난다고 해도 한국인의 심성에는 나와 이웃을 연결하고 나와 하늘을 연결하고 나와 대자연을 연결하면서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기본적인 품성이 있고 이는 결코 변치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정체성과는 별개로 이런 영적 지향성은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 공동체와 지구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인공들로 뻗어나갈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리라고 봅니다. 
 

종교 문제로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방법

우리가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비난하게 될 때는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심리적인 역동이 숨어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최근 <<관계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사람들은 상대방과 가까이 붙어 있어야 친밀한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죠. 거리를 두면 친밀감을 해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안전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도 거리 두기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입니다. 

특히 상대방과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에는 오직 상대방을 향한 공격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잠시 거리를 두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의 고승 틱낫한 스님은 분노 감정을 자신의 갓난아이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 보통은 우리 안에 있는 분노 감정을 뭐 괴한이나 악동처럼 여기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갓난아이처럼 여기라는 건 뭘까요? 아기는 때때로 말썽을 일으켜도 그냥 바라보고 이뻐하죠. 자신의 분노도 그런 갓난아이처럼 그냥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바람과 느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신념의 차이 혹은 종교관이나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면 반드시 기억하세요. 상대방을 향한 판단이나 비난을 잠시 멈추고 거리를 두세요.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세요. 그럼 상대방을 향한 나의 바람과 그 바람이 무너져서 생긴 내 느낌을 알게 될 겁니다. 갈등을 푸는 지름길은 상대방을 향한 화살을 거둬들이고, 자신의 속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겁니다. 그럴 때 놀라운 관계 회복의 선물이 찾아옵니다.
 

▲ 게티이미지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

저는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를 네 가지 해석의 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면 종교와 심리학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느끼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인 시각이겠죠. 종교는 신에 대한 경험이고, 심리학은 인간 경험의 영역인데 무슨 관계가 있겠어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그냥 별개가 아니라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종교란 인간에게 불안을 투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해석의 틀은 종교와 심리학이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미국 최초로 심리학과를 만들었을 때 초기 연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종교 경험을 연구했어요. 과학적 실증주의가 중요한 방법론이 된 지금은 심리학이 이런 종교 경험을 연구하는 게 결코 주류는 아니겠죠. 하지만 아직도 다양한 종교 경험을 다양한 심리학적인 방법론으로 탐색하는 연구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종교와 심리학은 반드시 만나야 하고 상보적인 통합이 필요하다는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역을 보면 늘 정통과 이단, 선과 악, 좋은 신앙과 나쁜 신앙, 이렇게 양자로 구별하는 일에 아주 익숙합니다. 하지만 조금 전 설명한 발달 심리학의 도움을 받으면 종교인의 신앙이 어떤 단계에 와 있는지, 좀 더 성숙한 신앙과 영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발달해 가야 하는지 그 로드맵에 대한 세밀한 가이드와 비전을 줄 수 있습니다.

평생 발달 심리학 연구에 매진한 종교학자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신앙 발달의 단계 모형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처음에는 모방을 기본으로 하는 투사적 신앙, 두 번째 단계는 문자 그대로 믿는 신화적 신앙, 세 번째 단계는 특정 신앙공동체에 귀의하는 어떤 인습적 신앙으로 발달한다고 봅니다. 더욱 성숙한 단계의 신앙이 되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앙이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그 신앙을 재해석하고 의심하는 반성적 신앙으로 발달해야 합니다. 

다음 네 번째 단계는 다양한 시각을 접하면서 정반합, 변증법적으로 종합해가는 결합적 신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최고의 신앙 단계를 파울러는 개별 종교의 차이가 없이 더욱 성숙한 경지에 이르는 보편적 신앙의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파울러 교수는 누구나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보편적 종교가 가진 고귀한 가치를 실천하는 이들이 분명히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종교와 심리학의 통합을 연구하는 신학자이기도 하고, 또 상담과 코칭 서비스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반적인 상담 서비스가 목표로 하는 자존감 회복이나 자기 효능감을 증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계보건기구가 정의하는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혹은 심리적, 사회적 웰빙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많은 건강 연구자들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영적인 웰빙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계적이고 초월적인 본성을 극대화하고, 행복의 질을 가장 높이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상담과 코칭을 하는 임상 현장이 종교와 심리학이 만나는 미팅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정리_편집부

※ ‘브레인셀럽’ 유튜브 영상에서 권수영 교수의 더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클릭)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종교이야기 | 연세대 권수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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