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만든 '만든' 성군, 세종은 어떤 책을 읽었나

책이 만든 '만든' 성군, 세종은 어떤 책을 읽었나

[신간] '세종의 서재'(서해문집 간)

   조선 세종대왕하면 우리는 ‘한글 창제’를 떠올린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라는 화려한 꽃을 피우기까지 세종이 어떤 책을 읽어 어떤 공부를 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세종이 타고난 천재여서 별다른 노력 없이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니다. 그 또한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중 일부 세종을 ‘성군으로 만든 책’과 ‘조선의 요순시대’를 만든 ‘세종의 책’을 소개하는 책-《세종의 서재》(서해문집 간)를 박현모 여주대학교 교수 등 12명 공동으로 집필해 펴냈다.


이 책은 여주대 세종시대 문헌연구팀이 진행한 심층해제문 가운데 ‘세종시대를 잘 드러내는 문헌’과 ‘세종을 만든 책’을 선별해 소개한다. 이 문헌 전문가들은 책의 해제와 함께 세종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세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파헤쳤다. 
세종에게 책이란?  ‘그의 존재 자체’였다. 세종에게 책은 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책은 세종에게 용도(用度) 이상의 것을 뜻했다. 어린 세종-충령이 밥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까닭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이 일으킨 왕자의 난을 지켜봐야 했다. 왕자가 되어서도 그는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어린 그에게 살벌한 정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책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국가경영의 비결을 ‘책을 통한 지식경영’에서 찾았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믿었던 세종은 하늘(곧 자연)의 질서를 면밀히 관찰하되, 거기서 발견한 지식과 정보를 나라 다스리는 데 활용했다. 거의 매일 경연을 열어 신하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안 본 책이 없었고, 독서 후에는 정책에 활용했다.
“책을 보는 중에 그로 말미암아 생각이 떠올라 나랏일에 시행한 것이 많았다”(《세종실록》 20년 3월 19일)

세종을 만든 책

청년 세종의 애독서는 《구소수간》이다.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의 서찰을 모은 책으로, 한문 서찰을 작성할 때의 지침서로 꼽혔다. 세종이 백 번, 천 번 읽었다고 대대로 회자될 만큼 애독하던 책이다. 구양수와 소식의 척독(尺牘)에 잘 드러난 두 사람의 활달하고 분방한 사유 양식, 농후한 서정성, 빼어난 문체 미학에 푹 빠진 세종은 그 감수성을 훈민정음 창제의 한 동인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문장의 진술성과 함께 전달성과 표현성을 강조한 것은 잠저 시절 읽은 《구소수간》의 응축된, 미학적 문장에 깊이 공감한 결과일 것이다.



세종이 즉위한 후 첫 경연 교재로, 세종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이 있다. 남송(南宋)의 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대학연의》. 《대학(大學)》의 이해를 돕는 해설서로, 경전과 사서(史書)에서 관련 내용을 뽑고, 상세한 해설을 붙인 방대한 책이다. 모두 성군(聖君)의 정치를 구현하는 데 가장 긴요한 사례로 쓰였다. 수시로 대두되는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자 할 때 《대학연의》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의 즉위 교서로부터 시작해 국정 철학의 핵심인 ‘민유방본(民惟邦本 :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이다)’에 이르기까지 세종의 많은 말과 행동이 이 책에서 적잖이 발견된다. 양녕이 세자시절에 공부했던 《대학연의》를 세종은 임금이 되고서야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연의》는 당시 제왕학 교재였으니 세자가 아닌 세종이 보면 위험한 책이었다. 세자가 된 충녕이 첫 서연에서 공부한 교재는 사서(四書)였다.
 
조선 법관의 필독서로 꼽히는 《당률소의(唐律疏議)》. 이는 중국 당나라 《당률(唐律)》을 주석한 법전으로 당나라 장손 무기(長孫無忌), 이적(李勣) 등이 고종의 칙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 《당률》은 황제의 통치권을 형법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로, 국가 기능과 작용에 관한 모든 죄를 형법으로 일원화했다. 다만 그 바탕은 유가의 예다. 세종의 통치 원칙과 부합되는 법전으로 이를 택한 것은, 바로 법치 지향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세종은 유교 법제의 종합인 당률을 조선의 일반법으로 수용했다.
세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정조격》 등 다른 법전을 활용했다. 원나라 최후의 법전 《지정조격》은 중국 법제가 황제 중심에서 육부 중심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현재 경주본이 실물로 전해오는 세계 유일본이기도 하다. 세종이 적극적으로 보급에 나서 강독과 시험, 그리고 인사고과에도 반영할 만큼 중시했다. 예악과 법제의 정비 그리고 구체적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형사법원으로 《지정조격》을 활용한 것이다. 제도보다는 관례가 중시되는 영역과 법의 공백을 보충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신하들과의 토론으로 합당한 결론을 도출했으며, 이러한 결론의 근거를 찾아가는 과정은 조선이 통일법전국가로 자리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종시대가 만든 책

유교 국가인 조선은 세종 대 예악문물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천문학, 지리학, 의학과 같은 과학기술 분야를 다루는 책이 꼭 필요했다. 그것이 유교의 정치사상과 긴밀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농업 지식의 표준화, 시간의 표준화 작업과 백성이 사용하는 언어의 표준화 사업이 맞물려 진행되었다.

▲ 세종이 잠저에 있을 때 백 번, 천 번 읽었다는 책이 '구소수간'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으로 저자들은 《훈민정음(해례본)》, 《삼강행실도》, 《세종실록악보》,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역대병요》, 《칠정산내편》, 《제가역상집》을 소개한다. 이 책들을 통해 세종 시대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세종은 《훈민정음해례본》을 통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내보였다. 그 결과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한” 장점을 갖게 되었다. 자연의 원리를 깊이 깨달아 사물을 디자인해서 모든 존재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미학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백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다는 것은 ‘형상을 본떠서 만든’ 디자인 철학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서 모범이 되는 효자, 충신, 열녀 110인을 가려 뽑아 그림과 글로 엮은 책 《삼강행실도》. 세종이 직접 편찬 의도와 보급의 범위, 강습의 방식까지 명한 이후 성종 대에 한글본이 나오는 등 조선의 전 시기를 대표하는 교화서로 의미를 지녔다.

세종이 왕조의 건국과 치세의 공덕을 드러내고자 한 《세종실록악보》. 음의 높이와 길이, 선율악기와 타악기, 선율과 가사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낸 기보 방식은 우리 음악 사상 음악 기록의 혁명적 전환점을 마련한 중대한 성취다. 또한 유교 국가의 지도자로서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공동체적 공감대를 확산한다는 전형적인 악교 실천의 성과물을 낸 것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을 담은 책, 《농사직설》. 전국 각지의 노농들이 오랜 경험으로 전수해온 농사 기술을 들어 수집하고, 그렇게 수집한 경험 과학을 지방관의 직접 실험을 통해 실증 과학으로 승화시킨 종합 과학서다. 

제 나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제 나라 풍토에 적합한 제 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며, 향약을 이용한 처방을 종합 수집한 《향약집성방》. 독창적인 우리 특유의 향약을 개발하고 궁촌벽민의 경험방까지 정리해낸 것은 획기적인 대사업이었다. 모든 약재의 명칭을 당시의 언어인 이두로 표기하여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했으며, 국내에서 나는 약재를 채집할 때도 이에 따르기만 하면 되도록 표준화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쟁사이자 동아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대병요》. 세종이 직접 기사를 선택하고 취합했다. 세종은 중국과 한국의 역대 전사 가운데 후세 국왕과 신하, 장수들이 본받고 경계해야 할 전쟁이나 전투를 선택했다. 중국 역대 전사에서는 교훈을, 우리 역사에서는 자긍심을 찾아 명, 여진, 일본 사이에서 조선이 자강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역사서이자 병서다.


《칠정산내편》은 ‘하늘에서 움직이는 일곱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다룬 책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법서로서, 원나라의 수시력을 기초로 조선의 위도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세종 초년부터 시작된 천문역산학 정비 사업은 세종26년(1444)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의 간행으로 귀결되었고, 그 성과를 종합 정리한 《제가역상집》이 편찬된 것은 그 이듬해인 세종 27년(1445) 3월이었다. 27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의 완성이었다. “천문·역법·천문기기에 관한 글이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을 종합·정리한 책이 《제가역상집》이다.


이렇게 천문역산학의 정비는 조선 개창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지도와 지리지의 편찬은 실용적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했지만, 국가 운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토지와 인민에 대한 왕권의 일원적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업이기도 했다. 아악의 정비와 도량형의 통일은 유교적 예악사상의 구체적 실천이었고, 농학과 의약학의 발전은 유교적 인정(仁政)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중시되었다.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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