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다섯 살 무렵. “때가 되면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이렇게 살다 은퇴하고 연금받고 사는 게 인생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림이 손짓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냥 좋아서’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유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북 칼럼니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재능기부자로 유쾌한 나날을 보내는 밥장Bob Chang. 그는 실제로 해봐야 성공하든 실패하든, 또는 많든 적든 보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림이 내게로 왔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죠. 그림은 재능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아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그림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냥 단순하게 그리기만 했어요. 하루에 10시간이고 12시간이고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렸어요.” 그 시간이 일주일, 한 달, 일 년, 이 년 쌓이고 나니 지금의 자신이 있더라고.
밥장, 그는 징그러울 만큼 생생하게 솔직하고 유쾌하다. 솔직함이란 게 도가 넘치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솔직해서 서로가 편한 경우라면 그 솔직함은 유쾌함이 된다. 그는 글과 그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을 꾸미지도 숨기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에게 그림이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자 그를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다. “그림으로 먹고살고, 매일 그림 그리는 것이 즐겁고, 그림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나누거든요. 또 그림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고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아끼고 좋아해줘야 자신도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도움도 주고 싶었던 그는 도서관 벽화 그리기로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을 돌면서 여행하듯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림을 그려드리면 관계자 분들이 지역 특산물을 선물로 주시거나 맛있는 것을 많이 사주시죠. 하하.”
그림은 그의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스몰에이형’ 성격을 180도 바꿔놓았다. “친구들이 보면 놀라요. 쟤가 우리가 아는 석원이 맞느냐고 하죠.” 그림을 그릴 때 꼬박 6~7시간 앉아 있는데 컴퓨터가 아닌 수작업으로 하기 때문에 실수했다고 그 부분만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그냥 밀어붙여야 일이 진행된다. “한번 그리면 고치지 못하니 색상 하나, 펜 하나 사용할 때도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에요. 그러다보면 실수가 의도하지 않았던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잘못된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생각이 오히려 일을 망치죠. 삶에는 변수가 엄청나게 많잖아요. 변수에 대처하는 방식이 우리의 삶을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스몰에이형 석원’은 그림과 함께 어느덧 ‘열혈 밥장’으로 변모했다.
아침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하기
밥장은 아침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니 하루하루가 새롭고 그런 설렘 속에서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을 세운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에 이루고 싶은 것을 상상하면 그것이 현실의 추진력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해요.”
상상은 곧 그가 그리는 그림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독서광, 메모광이다. 편식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다. 요즘 읽고 있는 《뇌의 문화지도》라는 책에 대해 그는 “과학을 문학적 느낌으로 잘 살려 써서 뇌, 감각, 기억 등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 쉽게 읽혀요”라고 평한다.
“철학자들의 삶을 보면 산책을 많이 했잖아요. 그게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저도 몸을 쓸 때 뇌가 잘 돌아가는 걸 느끼죠. 하루의 리듬을 관리하기 위해 산책을 하듯, 일 년이라는 시간의 리듬을 잘 타려면 여행이 필요해요.
몇 달 전에는 통영에서 한 석 달 머물다 왔어요. 환경이 바뀌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채로워지죠. 특히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활동들이 꼭 필요해요. 안주하면 창의적인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책이나 여행보다 더 궁극적인 아이디어의 원천은 역시 사람이다. “만날 보는 사람만 만나서는 발전이 더뎌요. 그림을 매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꽤 많은데,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정을 나누다 보면 자신의 존재감도 느끼고 그림에 필요한 아이디어도 얻게 되죠.”

재능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몰입하느냐 하는 것
그는 최근 네 번째 책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를 냈다. 그림 그리고, 책 내고, 서평 쓰고, 재능기부하고…… 재주가 참 많다. 그래도 “가장 자신 있는 일은 그림”이라는 답변을 기대했는데 “자신이 없어서 이것저것 다 해요. 절박해서 하는 거죠”라는 농 섞인 답이 돌아온다.
지나친 겸손이라고 하니 “무엇을 할 때 꼭 배워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본적인 것 몇 가지만 숙지하고 그냥 하는 거죠. 처음 책을 쓸 때도 그랬어요. 출판사 편집자가 ‘징그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너무 길지 않게 쓸 것’을 조언했죠.
그림을 배울 땐 화가 친구가 ‘크게 많이 그리라’고 했고, 사진을 배울 땐 사진하는 친구가 ‘수직 수평만 맞춰서 찍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는 그들의 조언을 따랐다. 그리고 이제 자신 있게 말한다. “무엇이든 하면 늘고 재능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몰입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가끔 프리랜서인 자신의 위치가 불안하진 않을까, 조직의 방패가 그립진 않을까 궁금했다. “조직에 속해 있다고 안 불안할까요? 아마 더 불안할 걸요? 요즘 회사들은 불안감을 조장해서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구성원들은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시간을 회사에 저당 잡히고 살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간을 흘려보내고 마는 거예요. 평균 수명은 자꾸 느는데 말이죠. 자신의 시간을 가치 있게 쓴다면 어디에 속해 있든 아니든 불안에 휩싸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일단 시작하세요!
“뭔가에 꽂히면 고민하지 말고 일단 그냥 해보세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고민만 깊어지고,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돼요. 남의 눈을 의식하고 경제적 가치에 얽매이면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아져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늘 생각만 하고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거예요.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그는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고, 또 흥미로운 일이 생기면 그것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대학입학-군대-복학-취업-은퇴’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일정한 틀을 깨고 진짜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은 밥장. 그의 또 다른 꿈은 우리나라 남성의 롤모델이고 싶다고.
“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하하.”
글·정소현 nalda98@brainmedia.co.kr | 사진·김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