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문화가 진화하고 있다. 남을 돕고 싶지만 부자가 될 때까지 기부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재능을 투자하여 자기 깜냥만큼 실천하는 새로운 기부 문화가 확산되면서 기부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해외 유명 광고제를 휩쓸며 광고 천재로 불려온 이제석은 올 7월 창간한 <빅 이슈 코리아>의 표지 편집장을 맡았다. <빅 이슈>는 존 버드가 영국에서 창간한 잡지로 잡지 판매 수익으로 노숙인이 자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체다.
이씨는 이 잡지의 창간호부터 50호까지 표지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작업 방식이 특이하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기부하는 형태로 작업하기로 한 것이다. <빅 이슈>는 영국에서 처음 발행할 때부터 유명인들의 재능 기부로 화제가 되었다.
앤젤리나 졸리, 오프라 윈프리 등이 무료 표지 모델로 재능 기부를 했고, <해리포터> 시리즈의 조앤 롤링이 무료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동안 아름다운 재단, 월드비전, 사랑의 열매 등 NGO 단체의 광고 기획을 맡아온 광고인답게 이씨는 이번에도 흔쾌히 재능을 기부하기로 했다.
기부 문화의 새로운 흐름, 재능 기부가 뜬다.
국내 기부 문화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그동안 돈을 기부하는 것이 대부분이던 기부 문화가 개인이 가진 재능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누는 재능 기부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재능 기부는 말 그대로 기부자가 직접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투자해 누군가를 돕는 형태의 기부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개인의 재능을 나눈다는 점에서 기부와 자원봉사가 접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재능 기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뿌리 내린 서구 사회에 일찍부터 자리 잡은 ‘프로 보노pro bono’에서 유래했다.
라틴어로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프로 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에서 따온 이 말은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안 되는 소외계층에게 무상으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물론 국내에도 프로 보노의 사례는 익히 있어왔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법률 상담, 무료 변론 등의 법률 구호 활동을 펼치는 변호사들이나 오지와 낙도 같은 의료 사각지대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의사, 간호사 등의 사례가 그것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서는 공연 예술계, 기업계,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창의적인 재능 기부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목소리에서 인세까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나눈다.
재능 기부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분야는 아무래도 문화 예술계다. 가수는 목소리를, 작곡가는 노래를 기부하고 축구 선수들은 친선 경기로 기부금을 모은다. 무엇이든 자기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눈다면 재능 기부가 될 수 있다.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동참하는 기부로 자신의 목소리를 기부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보네이션voice+donation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탤런트 정혜영과 가수 알렉스는 홀트아동복지회 홍보 동영상에 목소리를 기부했다.
개그맨 신동엽은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의 라디오용 장기기증 광고에 목소리를 기부했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도 가수 이문세·양희은, 탤런트 채시라의 음성으로 광고를 제작했다. 목소리 기부의 효과는 의외로 파급력이 있다.
작년 12월 초 탤런트 배용준이 유엔 환경계획의 ‘기후변화 관심 촉구 캠페인’에 목소리를 기부한 적이 있는데, 겨우 3백여 명에 불과하던 캠페인 서명자가 2주 만에 7천 명으로 늘었다.
아름다운 1% 나눔 운동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재단은 문화 예술인들의 재능 기부 프로그램을 운영해오고 있다. 작가들은 자신이 쓴 책의 인세를, 사진작가는 촬영 기술을, 영화인은 자신의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재능을 기부한다.
2001년부터 시작된 ‘인세 기부’에는 현재 작가 1백70여 명이 동참하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의 첫 인세 기부자인 소설가 신경숙은 소설 《리진》과 《바이올렛》 등의 인세로 1천만 원 가까이 기부했다. 안도현 시인은 시집 《연어》 1백 쇄 출간을 맞아 인세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연극계의 재능 기부도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여성단체연합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연극배우 권해효는 연극 <러브레터>에 연기 재능을 기부해 여성미래센터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10년 가까이 여성운동을 지지해온 그의 재능 기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에도 연극 <아트>에 출연해 여성민우회 발전기금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은 연극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의 수익금을 물 부족 국가에 우물을 설치해주는 데 쓰고 있다. 배우들은 노 개런티로 ‘재능 기부’에 참여하고 티켓 판매금을 월드쉐어의 저개발국 식수 지원 사업에 기부한다.
지금까지 수익금으로 캄보디아의 마을 두 군데에 ‘생명의 오아시스’ 우물 1호와 2호를 만들어주었고, 방글라데시에도 지원할 예정이다.
비정규 아티스트 밥장은 우연히 MBC와 지자체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지역 도서관 만들어주기’를 보고 게시판에 직접 글을 올려 재능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전라도에 있는 한 도서관에 벽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고 자비로 내려가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주는 재능 기부를 하고 돌아왔다.
녹록치 않은 노동과 수고가 동반되는 일이었지만 막상 그 일을 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은 데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부산 신세계센텀시티에서 내부 벽화를 그려달라는 제안까지 받았다. 조건 없는 재능 기부가 경력을 쌓고 인지도를 높이는 일과도 연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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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재능도 기부하다.
최근 대기업들의 재능 기부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방법 또한 과거의 생색 내기용 일회성 거액 기부가 아니라 기업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살린 기부 형태라는 게 특징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디자인 경영으로 유명한 현대카드의 디자인 기부. 현대카드는 지난해 말 서울역 앞 대중교통 환승센터를 직접 디자인해 서울시에 기부해 화제가 되었다.
화려한 LED 스크린으로 만든 버스 승차대는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에게 즐거운 기다림의 시간을 선사했다. 현대카드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제주의 대표 관광명소인 올레길에 ‘간세’ 사인 3백 개를 설치했다.
제주도의 상징인 조랑말을 형상화한 이 표지판은 자연과 사색이 함께하는 새로운 여행 아이콘으로 떠오른 올레길에 썩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업의 재능 기부가 일회성 이벤트 형식에서 벗어나 지속성과 연계성이 있는 봉사활동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화건설은 2005년부터 자사의 재능을 십분 활용해 집수리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매년 4월부터 6월까지 수리가 필요한 집들을 찾아다니고 봄, 여름, 가을에 걸쳐 봉사활동이 이루어진다.
현재까지 5백 채가 넘는 집을 수리해왔다. 최근에는 단순히 집수리에 그치지 않고 건물을 지어서 기부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노숙인들의 쉼터인 ‘Drop in’ 센터와 서울역에 있는 ‘아름다운 가게’가 대표적이다. 한화건설의 재능 기부는 장애인이나 기초 생활 수급자, 노숙인 등 자력으로 일어서기 힘든 계층을 골라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기업들의 행보는 기업의 기부가 단순히 금전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재능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특히 기업의 재능 기부는 규모와 파급 효과 면에서 개인이 하는 재능 기부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기업이 가장 잘하는 능력으로 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브랜드 홍보 효과도 노릴 수 있다.
사실 변호사나 의사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전문가들의 재능을 돈으로 사려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기에 사회적 약자 계층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맞춤식 재능 기부는 사회의 사각지대를 채우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취약 계층의 일자리 창출 등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의 자활을 돕는 전문가들의 컨설팅 재능 기부가 눈길을 끄는 것은 그래서다. 사회적 기업 지원 네트워크(SESNET)와 소셜 컨설팅 그룹(SCG)은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경영 컨설턴트 등의 전문가 그룹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기업의 자립을 지원한다.
이들의 재능 기부가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일회성 컨설팅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기업이 자립에 성공해 수익을 낼 때까지 지속적으로 컨설팅이 이뤄진다는 데에 있다.
나누려는 의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유명인이나 기업의 재능 기부 못지않게 일반인의 재능 기부도 다채로워지고 있다. 굳이 몇십 년을 갈고닦아야 하는 대단한 재능일 필요는 없다. 각자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자신이 지닌 한두 가지의 능력으로 자기 깜냥만큼 기부하면 된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네이버 블로거 ‘자유비행인간’은 자선 단체에서 하는 행사나 공연에 필요한 대본을 써주는 것으로 자신의 재능을 기부한다. 그는 “평소에 이런 일은 꽤 짭짤한 벌이가 되지만 기부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능 기부의 장점은 어차피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는 거라서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재능을 썩히느니 좋은 일에 기꺼이 쓰는 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디자인을 전공한 블로거 ‘뚱상인’은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서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지원하는 ‘꿈나눔책’의 CI를 제작해 기부했다.
캘리그래피 작가인 블로거 ‘아넬리스’는 유니세프에서 주최하는 사랑의 맨발 걷기 행사에 텀블러용 손글씨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미술을 전공한 대학생은 저소득층 아이들 공부방의 미술 교사로 재능을 기부하고, 사진작가는 노인정에 찾아가 영정사진을 찍어준다.
헤어디자이너는 노인들의 머리를 무료로 다듬어주고, 택시기사는 무료로 장애인이동 서비스를 해준다. 간단한 요리나 빨래, 아이 돌보기 등의 봉사뿐만 아니라 학업 멘토링,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 읽어주기, 어르신 말벗 되어드리기에 이르기까지 소소하고 다양한 재능 기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최근에는 블로그뿐 아니라 트위터 등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재능 기부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제 나눔의 의미가 점차 다양해져 재능 있는 사람은 재능을, 시간을 기부할 사람은 시간을, 돈으로 마음을 전할 사람은 돈을 기부하는 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재능 기부를 통해 기부 기관은 적은 금액으로 큰 홍보 효과를 볼 수 있어서 좋고, 기업체나 재능을 가진 사람은 기부의 즐거움뿐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홍보하는 효과까지 덤으로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무엇보다 재능 기부는 개인의 특별한 재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기부는 거창하고 어려운 게 아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울한 사람에게 즐거운 노래를 들려주거나 웃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재능이고,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나누려는 기꺼운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재능 기부가 기부 불모지인 우리 사회의 든든한 기부 문화로 뿌리 내리기를 기대한다.
글·전채연 ccyy74@naver.com | 일러스트레이션·이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