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틀을 벗어던진 Atrist 팝아트의 대표화가 앤디 워홀

관념의 틀을 벗어던진 Atrist 팝아트의 대표화가 앤디 워홀

비즈니스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뇌2003년12월호
2013년 01월 09일 (수)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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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작업실(factory)에서 촬영한 사진


밝고 튀는 조야한 색상, 할리우드의 요부들과 함께 켐벨 수프 깡통을 타고 온 슈퍼스타 앤디 워홀. 처음부터 그는 상업미술가로 시작을 했고 또 상업미술가 출신이라는 호칭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그 또한 자신의 이력을 “나는 상업적 예술가로 시작하여 사업 예술가로 마무리 짓고 싶다”라는 말로 일축하곤 했다. 

하지만 상업미술가라는 호칭은 순수미술(fine art)을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예술적 가치수준이 떨어진다는 경멸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워홀도 거기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 자신이 상업미술가라는 것을 당당히 여긴 워홀은 결국 상업미술가로 성공한 것 이상으로 순수미술계에도 이바지 했다.

뽀빠이를 우상으로 삼게 된 유년시절

체코 이민세대의 아들로 태어난 앤디 워홀의 본명은 앤드류 워홀라Andew Warhola이다. <보그>와 <하퍼스 앤 바자>,<글래머>등의 잡지에서 일하며 상업미술가로 명성을 얻게 될 즈음 그는 그의 체코식 이름 ‘워홀라’의 끝 글자를 떼어 노동 이민 출신 배경을 탈피, 신분상승을 꾀한다.

후에 팝아트로 작가 대열에 올라선 후에는 드렐라Drella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드렐라란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쳐 부른 합성어이다.

그러나 이런 별명에 비해 그의 성장배경은 매우 불우하고 힘들었다. 체코에서 징집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그의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는 펜실베이니아 탄광지대에서 광부로 일했고, 어머니 줄리아는 힘든 경제사정으로 가족들보다 9년이나 나중에 미국에 왔다. 워홀은 1928년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심약했던 유년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어린시절 자주 신경쇠약증을 앓았다. 여름방학 때였는데 난 여름 내내 라디오를 듣거나 침대에 누워 찰리 매커시 인형과 종이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그때 나의 우상은 딕트레이시와 뽀빠이였다.”

그는 유년의 대부분을 엄마와 함께 집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런 성장환경 탓인지 유달리 수줍음이 많았던 워홀은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런 성격은 성공한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예술관 대해 얘기하는 것조차 무척 싫어했는데 “말할 것이 없을수록 더욱 완전한 것이다”라는 말로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일축한다. 확신에 찬 자신감을 지니면서도 자기 비판적이었고,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면서도 세간의 이목을 받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확실히 괴짜의 기질이 다분했다.








마릴린 딥틱, 캔버스에 에나멜 실크 스크린과 아크릴릭 유채(1962)



팝아트의 대가로 서다

앤디 워홀 예술세계의 기저가 된 장르는 팝아트이다. 본래 팝아트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 거의 비슷하게 시작된 것이지만 1960년대 급속한 산업발전과 대중적 소비문화의 파급 면에서 볼 때 미국의 팝아트가 가장 대표 격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팝아트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서양의 전통적인 예술관을 극복하고자 대중문화와 텔레비전 상품광고, 쇼윈도광고 등을 끌어들여 산업사회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의 ‘마릴린몬로’, ‘코카콜라’, ‘백 개의 수프깡통’ 등 키치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업들은 실크 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현대의 대량소비문화에 대한 찬미와 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다. 팝아트의 대가로 주목받게 된 것도 이러한 유명 상표나 상품을 집중적으로 그려서 만든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단순 이미지의 반복으로 마치 텔레비전이나 잡지 광고에 나가듯이 배열하는 것인데, 우리시대의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어떠한 논평 없이 묘사하고자 한 그의 예술적인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다.  


예술의 다음 단계는 Business Art

1945년 피츠버그의 카네기 테크 대학을 졸업한 후 오로지 유명해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뉴욕에 도착한 앤디 워홀. 뉴욕에서 결국 그는 그의 소망처럼 평생 세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살아갔다. 특유의 밤톨 같은 펑키헤어스타일을 죽을 때까지 고수해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얻게 되는데 그런 헤어스타일의 일화로 파티를 참석하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헤어스타일이 망가질까 포옹도 조심하는 등 언제나 특이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고, 어쩌면 이런 그의 기행이 유명인사들과의 친분을 유지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같다.


또한 자신이 ‘사회 병’을 앓고 있어 매일 밤 외출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딘다며 말하곤 했는데, 그는 파티에 초대받지 않는 날에는 저명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클럽을 찾아가서 저명인사들의 사진을 찍어 작품의 소재로 쓰거나,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인터뷰 Interview지의 표지 모델로도 소개하였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작품이 처음부터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1952년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전을 뉴욕의 휴고 Hugo 화랑에서 열게 되지만, 당시엔 한 점도 팔지 못했다. 약 10년 후 LA의 패러스Ferus 화랑의 어빙 블럼Irving Bloom에서도 36점의 캠벨 수프 깡통을 주제로 한 그림을 전시하였으나 이전 작품은 스스로 구입하는 등, 이 개인전의 반응 또한 시원치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 그의 전시회가 열리는 화랑 근처에서 진짜 수프 깡통을 쌓아놓고 ‘진짜가 단돈 29센트’라고 써서 붙여 놓기까지 하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혹평이 이어졌다.

그러나 팝아트 전시 중에 가장 의미 있는 ‘뉴 리얼리스트’전에 출품된 계기로 그는 맨해튼 일대 미술계의 유명 인사가 된다. 워홀은 자신이 작업한 소재 콜라 병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이 나라 미국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도 본질적으로 가장 가난한 소비자들과 똑같은 것을 구입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점이다. TV 광고에 등장하는 코카콜라는 리즈 테일러도, 미국 대통령도 그것을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신들도 마찬가지로 콜라를 마실 수 있다. 콜라는 그저 콜라일 뿐 아무리 큰 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모퉁이에서 건달이 마시고 있는 콜라보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유통되는 콜라는 모두 똑 같다.”

이렇게 그가 다룬 소재들은 일상에서 너무 흔하게 노출되어 주목 받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런 사물들이 주목받지 않기 때문에 감춰져 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녹색 코카콜라 병, 캔버스 유채(1962)


실크스크린의 연장, 그의 영화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워홀은 언더그라운드 영화에 몰두한다. 자신의 일상적인 반복과 지루함의 원리를 이용해서 점차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기록해 나간다. 미술에서 영화로의 전환은 매체의 종합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첫 작품 ‘잠 Sleep’에 이어 ‘엠파이어 empire’등 총 75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특히 초기 워홀의 영화는 실크 스크린작업의 연장선상으로 움직임이 없고 반복적인 영상을 지루하게 보여주었다.

첫 작품 ‘잠’은 스물 두 살의 잘생긴 존 지오르노의 잠자는 모습을 장장 6시간이나 보여준다. 그나마도 영화를 위해 촬영된 시간은 20분 정도이며 나머지 시간은 촬영된 20분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용 또한 한 남자가 잠자는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몸의 각 부분을 천천히 보여주는 방식이 전부다. 단순한 반복과 지루함을 그는 실크 스크린 방식을 넘어 영화라는 3차원적인 공간과 시간 속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이렇듯 워홀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의도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으며 사실 그의 의도 역시 할리우드식 영화 문법을 뒤집는 것이었다. 지루한 노컷에 초점 없는 화면들과 각본 없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들은 이제까지 할리우드식 전통 영화의 문법을 뒤집어 표현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제작되어진 영화들은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되어 혹평을 들은 반면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들을 위한 어워드에서는 최고의 호평을 듣는다. 이렇듯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는 그의 작품들은 이런 양극화의 평만으로도 세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평가내용과는 별도로 이런 자신의 작품들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즐거워했으며,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마티스처럼 유명세를 얻는 것과 그가 열광했던 스타처럼 되는 꿈을 이뤘다. ‘모든 사람은 15분 동안 유명해 질 수 있다’라는 모토 역시 스타적인 부와 명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그의 작업들을 통해 자신만의 내면적인 욕구를 은밀하게 담아냈다. ‘잠’ 등에서 보여준 주인공의 지루한 동작들과 지껄이는 듯한 일상적인 대사는 그의 숨겨진 진실을 표현한 하나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새로운 패러다임, 창조적인 뇌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진지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워홀은 그의 작품에서조차 인간적인 면은 완전히 삭제해버리는 무미건조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선호했다. 실크스크린은 누가 제작했는지를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익명성을 보장할 수 있으며 기계적인 생산 방식으로 무수한 복제도 가능했다. 나열하는 이미지의 방식도 단순 반복으로 개성과 감동을 제거, 냉담한 상태로 만들려는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낼 수 있었다.

이렇게 전통적인 예술 권위에 도전하여 관념을 뒤엎고 실크스크린 작업뿐 아니라 영화와 잡지 심지어 방송에까지 그의 작품 활동영역을 넓혀나가며 그는 놀라운 통찰력과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유머감각으로 당대 미국 예술계를 평정하였다. 그는 순수예술 역시 대중문화의 산실이라는 기본 인식 속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이런 시도들은 그를 현대미술의 한 획을 긋는 팝 아티스트로서 자리매김하게 했다.

새로운 인식과 창조의 열정이 만났을 때 우리 뇌는 보다 놀라운 결과들을 일궈낸다. 비록 처음에는 익숙하지 못한 패턴에 비난과 당혹감을 드러내더라도 말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에 대중이 찬사를 부여하기까지의 과정이 그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글│안정희
ajhee@powerbr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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