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 뇌 맘] ‘나’라는 존재는 뇌가 만든 표상

[내 맘 뇌 맘] ‘나’라는 존재는 뇌가 만든 표상

부캐와 멀티 페르소나가 확장되는 시대

브레인 88호
2021년 09월 14일 (화)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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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를 즐기는 세계관 만들기 놀이

“양념으로 얼룩진 흰 쌀밥을 감싸줄 수 있는 건 김 한 장이다”라는 명예회장의 메시지에 이어 “환경오염으로 얼룩진 지구를 감싸줄 수 있는 기업이 되겠다”라며 미래 경영 메시지를 발표한 기업의 리더가 있습니다.

<2021 P4G 서울 정상회의 비즈니스 포럼>에 선 ‘김갑생할머니김 이호창 본부장’. 그는 당당하게 미래 전략을 발표했습니다. “대한민국 1위 기업으로서 시가총액 500조 원의 김갑생할머니김이 대한민국 외교부와 함께 글로벌 경영의 새 청사진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ESG(Environment 환경, Society 사회, Governance 지배구조) 경영입니다.”


▲ 이창호 개그맨이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만들어낸 부캐 ‘김갑생할머니김 이호창 본부장’

전 세계 195개국에 송출된 이 방송을 본 83만여 명의 시청자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인물이 낯선 이름이라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발표를 한 이호창 본부장은 사실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KBS 29기 공채 개그맨인 이창호 씨가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만들어낸 여러 부캐(부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B대면 데이트’ 시리즈에서 재벌 3세로 설정한 이호창이라는 캐릭터에서 성격, 스타일, 상황, 직업 등을 구체화 했고, 구독자들도 그의 설정을 받아들이며 상호작용을 해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를 넘어 그가 존재할 법한 세상, 즉 세계관을 만들어냈고 대중은 이를 재미있는 놀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유튜브 채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그를 비롯한 다양한 부캐와 세계관 덕분입니다. ‘B대면 데이트’의 카페 사장 최준(개그맨 김해준), ‘한사랑산악회’의 김영남(개그맨 김민수) 등 실제 인물 같은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이에 채널을 넘어 부캐들의 상업광고나 방송 프로그램 출연 등이 이어지며 그들의 세계관은 더 확장되고 확고해져 갔습니다. 위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영상도 실제 외교부가 ‘피식대학’ 측에 콘텐츠 컬레버레이션을 요청해 제작했습니다. 


▲ ‘피식대학’의 ‘B대면 데이트’에서 카페 사장 최준 캐릭터로 주목 받은 개그맨 김해준

가상과 현실의 경계 넘나들기  

제5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MC 유재석도 MBC <놀면 뭐하니?> 프로그램에서 유산슬, 지미유, 유두래곤 등의 캐릭터로 부캐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계곡 산장에서 오리백숙집을 운영하며 정규 1집 앨범 ‘주라주라’로 음악 방송에 데뷔한 1945년생 ‘둘째이모 김다비’도 개그맨 김신영의 부캐입니다.

이와 같은 부캐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은 허구와 실재가 이어진 듯한 재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세대에게는 자신을 대체하는 온라인 캐릭터가 익숙합니다. 이전에는 온라인이 활성화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드는 ‘싸이월드’ 같은 SNS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자신의 캐릭터를 조종해 미션을 수행하는 RPG 게임 시장의 영향력도 큽니다. 부캐는 캐릭터를 통해 온라인에서 소통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기억을 연장합니다. 특히 가상의 캐릭터들을 실존하는 인물처럼 대하는 시청자들은 허구인 줄 알면서도 다 같이 시치미를 떼고 세계관을 함께 만들어가는 재미에 빠지게 됩니다. 

부캐를 통해 한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입니다. 개그맨 이창호는 ‘이호창 본부장’ 이전에 중년 아저씨 동호회 ‘한사랑산악회’의 ‘이택조 부회장’입니다. 최근에는 과도한 필터 사용 논란이 있는 아이돌 그룹 ‘매드몬스터’의 제이호로 열연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뛰어난 연기 디테일과 다분한 끼로 캐릭터와 세계관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 또한 2030세대 시청자의 요구와 맞아떨어집니다.

‘나’라는 존재는 뇌가 만든 표상 

일반적으로 하나의 직장에서 되도록 오랫동안 경력을 쌓으며 일과 생활을 구분 짓지 않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2030세대는 직장에서의 자신과 퇴근 후 자신을 분리하고자 합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시(워라밸)하고, 직장에서 업무를 하는 것 외에 여가 시간에는 자기 계발과 취미에 투자하는 등 생활에서의 만족감을 높이고자 합니다. 

또한 온라인 공간의 계정을 채우고 소통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역할마다 다양한 성격의 자아가 강화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업을 이끌며 활동적인 사람이 집에서는 조용하게 휴식하며 말수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조용하게 맡은 일만 하던 사람이 동호회에서 덕질할 때는 누구보다 뜨거운 경우도 있죠. BTS의 안무팀장으로 주변 사람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제이홉도 부모님이 걱정할 만큼 집에서 말이 없는 것을 본인의 단점으로 꼽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자신의 뇌가 나라는 존재에 대해 만든 표상입니다. 나의 뇌는 과거의 정보를 학습하고 내 환경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나를 표상합니다. 뇌는 ‘나’의 욕구와 감정, 사고를 통합해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고 실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인식이 있을 때 나와 너, 우리 등에 대해 예측하고, 사고와 행동을 정교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뇌가 인식하는 나의 표상과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표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현대에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황과 역할이 더 다양해지는 만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상되는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가 강화될 것입니다. 멀티 페르소나가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나 자신’을 뜻하는 ‘myself’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myselves’가 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캐릭터의 주체로서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는 힘을 키워야 이와 같은 다양성에 혼란을 겪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SNS에서는 실제 자신의 성격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기에 또 다른 자아를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만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더욱 조심하면서, 온라인에서는 예의 없는 댓글을 남기기도 하죠. 이렇게 여러 모습으로 발현되는 자신의 모습 중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거나 부정하면 혼란을 키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캐릭터의 주체로서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는 힘입니다. 부캐를 즐기려면 본캐가 안정돼 있어야 하니까요. 부캐에 빠지지 않고 즐겁게 활용하면 본캐도 더 건강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며 성장할 것입니다.

글_ 조해리 

유튜브 콘텐츠 기획자. 카이스트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중이다. 명상을 경험하면서 뇌와 의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관련 분야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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