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죽음을 기억할 때, 뇌는 삶을 다시 선택한다

[칼럼] 죽음을 기억할 때, 뇌는 삶을 다시 선택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관계와 의미 그리고 오늘의 삶

▲ 죽음을 기억할 때 뇌는 삶을 다시 선택한다 [사진=Unsplash]



우리는 스마트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림을 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충전기를 찾는다. 화면 밝기를 낮추고, 꼭 필요한 기능만 남긴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배터리 잔량이 갑자기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시간이 무한하다고 느낄 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작은 실수에 오래 매달리며, 가족에게 전할 말을 다음으로 미룬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삶의 우선순위는 빠르게 달라질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삶의 종료를 알리는 경고음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삶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게 하는 강력한 ‘재부팅 알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어떤 프로그램으로 살아왔는지, 불필요한 생각과 관계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는지, 남은 시간에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선택할지를 다시 묻게 한다.

인간의 뇌는 현재만 처리하는 기관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까지 머릿속에서 미리 경험한다. 전전두엽은 미래의 결과를 예상하고 계획을 세우는 데 관여하며, 해마를 포함한 기억 체계는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의 장면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본모드네트워크는 외부 과제에 집중하지 않을 때 상대적으로 활발해지며, 자전적 기억과 미래 상상, 자기성찰과 같은 내적 사고에 관여한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인간은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불안을 만들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고, 자녀를 돌보고, 후대에 무엇을 남길지 고민한다.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묻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다만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삶의 우선순위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안과 회피를 키우거나 기존의 가치와 신념을 더욱 강하게 방어하게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자각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에 통합하느냐이다.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한 사람

몇 해 전, 50대 후반의 한 기업 대표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 일하며 회사를 성장시켰고, 주변에서는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생활에는 가족과의 식사도, 취미도, 충분한 수면도 거의 없었다.

건강검진에서 여러 차례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이번 사업만 마무리하면 쉬겠다”고 말했다. 그 ‘이번’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 도중 가슴 통증을 느껴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병실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퇴원 후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는 것이 무서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두려웠던 것은 제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일정을 완전히 바꾸었다. 매일 아침 아내와 동네를 걷고, 한 달에 한 번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다. 직원들과의 회의에서도 실적을 묻기 전에 잠은 잘 자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를 먼저 물었다. 회사 업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일의 위치를 삶 전체 안에서 다시 정한 것이다.

몇 달 뒤 그는 혈압과 수면이 좋아졌고, 표정도 이전보다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예전보다 적게 일하지만 더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단순한 기분의 변화라기보다, 죽음을 가까이 경험하면서 삶의 가치와 행동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는 전전두엽이 관여하는 가치 판단과 자기조절 기능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요하지 않은 경쟁의 비중은 줄어들고, 관계와 건강, 의미 있는 활동의 가치는 커졌다.

비슷한 변화는 큰 병을 겪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 [사진=pixabay]


슬픔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것

40대 중학교 교사인 한 여성은 오랫동안 학생과 동료를 돌보면서 자신의 감정은 뒤로 미뤄 왔다. 학교에서는 항상 밝게 행동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슬픔과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 통화에서 어머니에게 바쁘다는 이유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장면을 계속 떠올렸다.

“그때 조금만 더 다정하게 말할걸.”

이 생각은 밤마다 반복되었다. 수면이 흐트러졌고, 작은 실수에도 눈물이 났다. 처음에는 슬픔을 잊기 위해 더 많은 일을 맡았지만 상태는 오히려 나빠졌다.

상담 과정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했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
‘나는 마지막에 따뜻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나는 아직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다. 일부 신경영상 연구에서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전전두엽 일부의 활동이 증가하고, 위협과 정서적 중요성의 평가에 관여하는 편도체의 반응이 감소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감정은 정체를 알 수 없을 때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언어를 통해 구체화하면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미안함뿐 아니라 함께 시장에 갔던 기억, 아플 때 죽을 끓여주던 모습, 자신이 교사가 되는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장면을 담았다.

처음에는 편지를 쓸 때마다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어머니의 죽음이 죄책감만을 불러오는 사건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기억으로 조금씩 재구성되었다.

기억은 단순히 저장된 기록을 그대로 꺼내 보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자전적 기억은 회상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감정과 관점, 이후에 얻은 정보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될 수 있다. 마지막 통화에서의 잘못에 붙잡혀 있던 기억이 ‘우리는 오랫동안 사랑을 주고받았다’는 더 넓은 이야기 속에 배치되면서 그녀의 슬픔도 점차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변했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서 회복한다는 것은 잊는 것이 아니다. 기억을 삶 속에서 다시 배치하는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이 삶을 마비시킬 때

30대 직장인 남성의 사례도 있다. 그는 가까운 친구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심한 불안을 겪었다. 친구와 같은 나이였던 그는 출근길마다 ‘나도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슴이 조금만 두근거려도 심장병을 의심했고, 비행기와 장거리 운전을 피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대신 삶을 마비시킨 경우였다.

죽음에 관한 생각이 즉각적인 위협으로 해석되면 편도체를 포함한 위협 처리 체계와 자율신경계가 활성화될 수 있다. 이때 교감신경계의 활동이 증가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얕아지며, 몸은 도망치거나 싸울 준비를 한다. 그는 이러한 신체 반응을 다시 죽음의 징후로 해석하면서 불안이 더욱 커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죽음을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에 관한 생각과 신체 반응을 구분하고, 불안을 언어로 설명하며, 안전한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이었다.

그는 불안이 찾아올 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실제 위험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
'친구의 죽음 이후 내 뇌의 경보장치가 예민해진 것이다.'
'가슴이 뛰는 것은 죽음의 신호가 아니라 불안에 대한 신체 반응일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막연한 위협을 구체적으로 분류하고, 자신의 생각과 신체 반응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감정을 명명하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은 혼란을 구조화하고 정서 반응을 조절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무모하게 살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미뤄 두었던 삶을 조금씩 회복했다. 부모님과 일주일에 한 번 통화하고, 대학 시절 좋아했던 사진을 다시 시작했으며, 건강에 대한 과도한 검색 시간을 줄였다. 죽음을 통제하려는 삶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삶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죽음과 상실을 경험할 때 관계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감정을 언제나 혼자서만 조절하는 존재가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표정과 목소리, 몸짓을 통해 안전감을 얻을 수 있다. 공감적인 대화와 사회적 지지는 위협에 대한 부담과 고립감을 낮추고 정서를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누군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이제 그만 잊어”라고 말하면 자신의 감정이 부정되었다고 받아들여 고립감이 커질 수 있다. 반면 “많이 보고 싶겠구나”, “그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구나”라는 말은 감정이 안전하게 머물 공간을 만든다.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안전감은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70대 남성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50년 넘게 함께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자녀들이 찾아와도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식사는 줄고, 텔레비전만 켜 놓은 채 하루 대부분을 소파에서 보냈다.

어느 날 손녀가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손녀가 오래된 사진첩을 가져오자 조금씩 입을 열었다.

“네 할머니는 비가 오면 꼭 부침개를 했어.”
“결혼식 날 내가 너무 긴장해서 구두를 바꿔 신고 갔지.”

그는 이야기하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손녀는 해결책을 말하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주 한 장씩 사진을 골라 그 사진에 얽힌 기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삶에서 아내와의 관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말과 기억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이어졌다. 그에게 상실 후의 회복은 떠난 사람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를 현실에 맞게 새롭게 조직해 가는 과정이었다.


죽음이 가르쳐 주는 네 가지 삶의 원칙

죽음에 대한 뇌과학적·심리학적 이해는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삶의 경험의 질은 시간의 길이뿐 아니라 주의의 방향에도 달려 있다. 뇌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하루는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가족과 식사하면서 계속 휴대전화를 보면 몸은 함께 있어도 대화와 관계에 충분히 몰입하기 어렵다. 반대로 단 10분이라도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시간은 오래 기억되는 관계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둘째, 감정은 무조건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신호이다. 슬픔은 사랑했던 대상이 자신에게 중요했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말하고 기록하고 나누는 것은 그 감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셋째, 인간은 관계 속에서 회복될 수 있다. 삶의 마지막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에게 선명해지는 것은 소유나 업무 성과보다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관계는 삶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인간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존재의 의미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환경이다.

넷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의 선택을 정리하는 일이다. 오늘이 마지막 하루일 가능성만을 생각하며 불안하게 살 필요는 없다. 다만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사소한 갈등을 오래 끌지 않고,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며,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을 수 있다.

실천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하루가 끝날 때 '오늘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은 무엇이었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짧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기회가 아니라 오늘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나 상실에 대한 불안이 떠오를 때 그것을 막연히 밀어내기보다 다음과 같이 적어볼 수 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은 삶에서 더 중요하게 선택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오늘 단 한 가지를 바꾼다면 무엇을 바꾸겠는가?'

이 질문들은 죽음을 예측하려는 질문이 아니다. 삶을 설계하기 위한 질문이다.

죽음은 인생의 화면을 갑자기 꺼 버리는 검은 버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에 대한 자각은 불필요한 창을 닫고,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을 다시 실행하라고 알려주는 재부팅 알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죽음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 오늘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더 많이 소유하는 대신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다. 더 빨리 달리는 대신 어디로 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을 숨기는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는 대신 지금 전할 수 있다.

결국 건강한 뇌는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뇌가 아니다. 죽음을 인식하면서도 두려움에만 머물지 않고, 그 사실을 삶의 의미와 관계, 실천으로 전환할 수 있는 뇌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뇌는 지금 정말 중요한 것에 깨어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오래 사는 기술을 넘어, 제대로 살아가는 지혜일 것이다.
 

글. 신재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뇌교육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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