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좋은 사람’ 되기를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좋은 사람’ 되기를 선택할 것인가

브레인 인문학

브레인 110호
2025년 06월 19일 (목)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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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인 인문학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 환경이 변화한 ‘인류세’의 시작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이 질문을 ‘우리는 어떠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스스로 재창조하고 이 지구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말이다.

지질학계에서는 인류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대를 더 이상 홀로세(Holocene)가 아닌 인류세(Anthropocene)로 분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류세의 흔적은 인간의 힘이 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간의 활동이 몇 만 년에 한 번씩 바뀔 전 지구의 표면을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를 홀로세로부터 분리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핵실험의 흔적인 플루토늄, 플라스틱 쓰레기, 닭 뼈 등 퇴적층에 쌓인 인공적인 물질들이 그 전과 확연히 다른 100퍼센트 인간 활동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지질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류세의 구분이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많은 환경운동가가 인간과 지구의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개념으로 ‘인류세’의 도입을 지지하고 있다.


인류는 공멸이 아닌 공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지구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그 막대한 영향력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은 여전히 부재하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지구의 한계 안에서 불가능하다면 우주 개발을 통해서라도 물질적 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결심만이 확고해 보인다.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성장의 한계’와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개발과 수탈’의 틀에서 보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오랫동안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개체 혹은 유전자들이 살아남는 공간으로 묘사되어 왔다. 다시 말해,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쟁의 장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사회에도 적용되어, 인간 또한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최우선으로 삼는 존재라는 자화상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정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며 자연의 이타성을 보여주는 과학적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과 동물은 개체의 이익을 넘어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경과학계에서는 자코모 졸라티 박사의 연구팀이 원숭이와 인간의 뇌에서 ‘거울 뉴런’을 발견하여 개체들을 서로 연결하는 공감의 메커니즘이 존재함을 밝혀냈다. 그동안 진화론에서 자연계의 생존 투쟁적 측면을 강조해 왔던 것에 비해, 실제 자연에는 협력과 공생의 사례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타성’의 동인과 범위가 너무 다양해서 이기와 이타를 서로 반대되는 성향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따라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고 싶다. ‘인간은 좋은 존재인가, 나쁜 존재인가’’ 우리말에서 ‘좋다’는 말에는 조화롭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쁘다’는 말은 나뿐이다, 다시 말해 나만 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두루 이로운 선택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이 ‘좋은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 시기이다. 심화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그로 인한 정치의 양극화, 그리고 기후변화 등 개인과 국가가 각자도생의 선택만 한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죄수들처럼 우리는 계속 공멸로 가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가 본래 나쁜 사람이라는 자화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다른 사람도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신뢰가 생기고, 공멸이 아닌 공생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죄수의 딜레마란 두 사람의 협력적인 선택이 둘 모두에게 최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나쁜 결과를 야기하는 현상을 말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화상을 갖기 위해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류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온 핵심 요소들이 ‘상호주관적 실재’라고 말한다. 상호주관적 실재는 화폐나 이데올로기, 종교적 신념들처럼 객관적 실재는 아니지만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되고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 것들이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신뢰받는 한 사회를 유지하는 힘을 가지며, 반대로 그 의미가 상실될 때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자화상 또한 근대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떠받쳐온 하나의 ‘상호주관적 실재’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허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화상을 갖기 위해서 우선은 그동안의 역사가 보여주듯 우리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힘과 창조성을 가진 존재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자화상이 충분히 많은 사람과 공유되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주는 자화상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상호주관적 실재’로서의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글_김지인 국제뇌교육협회 국제협력실장. 지구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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