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간 ‘현재’만 산 남자 헨리 몰레이슨

55년간 ‘현재’만 산 남자 헨리 몰레이슨

브레인 히스토리 ②

브레인 93호
2022년 06월 20일 (월)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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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4일, <뉴욕타임스> 신문 1면에 아이러니한 제목의 한 부고 기사가 실렸다. 

‘잊을 수 없는 기억상실증 환자 H.M. 82세로 사망(H.M., an Unforgettable Amnesiac, Dies at 82)’. _뉴욕타임스 부고기사(클릭) 
 

 

                                           ▲ H.M의 부고기사 ⓒ2008년 12월 4일 뉴욕타임스 1면

H.M.은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이름의 앞 글자만 딴 것이다. 그의 본명은 그의 사후에 공개됐다.

헨리 몰레이슨Henry Molaison 

그는 인간의 기억에 대한 비밀을 풀어준 뇌과학계의 역사적 인물이다. 헨리 몰레이슨은 새로운 것을 딱 30초만 기억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서 50년 이상을 뇌 연구 대상자로 참여했고, 12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그의 뇌를 연구했다. 기억에 관한 수많은 연구 논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신경과학, 인지과학, 의학 서적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를 통해 인간의 기억에 관한 중요하고도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30초 후 사라지는 기억

헨리는 7세 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에는 이마에 타박상 외에 별 이상이 없었고 빠르게 회복했다. 그러나 10세에 경미한 간질 발작을 시작으로 15세 생일에는 심각한 발작이 일어났다. 발작은 점점 심해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일했지만 빈번한 발작 때문에 그도 그만두어야 했다.

수많은 약물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마땅한 치료법이 없자 1953년 헨리의 나이 27세 때 미국 하트퍼드병원의 윌리엄 스코빌William Scoville 박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당시에는 간질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몸이 아닌 뇌가 원인이라 판단되는 증세는 전기자극으로 문제의 원인이 되는 뇌 부분을 잘라내는 ‘정신외과술’로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수술 전 헨리 몰레이슨(1953) ⓒ위키피디아


1936년 불안과 우울증을 앓던 중년 여성이 뇌엽절제술을 받은 이후, 증상이 호전되면서 미국에서만 4~5만 명이 정신외과술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약물과 정신요법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에 정신외과술은 대단히 위험한 수술로 규정되고 환자의 권리와 안전을 위해 전면 금지되었다.
 

헨리가 수술받은 1949년은 정신외과술의 절정기였다. 헨리의 간질 발작은 만성적이고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으며, 양쪽 측두엽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간의 측두엽 안쪽인 '내측두엽' 부위에는 해마와 편도체가 있다. 편도체는 뇌의 안쪽 측두엽 해마의 옆에 자리 잡은 아몬드 모양의 구조물로, 우리 기억에 감정이라는 색깔을 입히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타깝게도 헨리가 수술할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스코빌 박사는 헨리의 측두엽을 절제했고, 이로인해 헨리의 편도체와 해마의 3분의 2가 잘려나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간질 발작은 눈에 띄게 줄었고, 그의 성격, 태도, 지능 등은 수술 전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수술 후 헨리는 새로운 것을 30초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매일 병실에 오는 의료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과의 대화도 기억하지 못했다. 병실 내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오늘 날짜는커녕 조금 전에 뭘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헨리는 1953년 수술 이후에 경험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수술 전에 겪거나 배운 것은 거의 그대로 기억했다. 부모와 친척, 역사적인 사실 등을 기억했고 어휘도 풍부했다. 양치질, 면도, 식사 같은 일상생활도 문제없이 해냈다.
 

▲ (좌)정상인의 뇌 (우)해마가 제거된 H.M의 뇌ⓒBrainFats.org


“나는 지금 나와 논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으로 나뉜다. 단기기억은 눈앞의 현재와 관련한 것, 특별히 암기해서 장기기억 속에 보유하지 않는 형태이다. 가령 누군가가 전화번호를 말해주면 그 숫자는 잠깐 단기기억으로 보유하지만 휴대폰에 저장하거나 메모로 남기는 순간 바로 잊어버린다. 반대로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하는 정보는 장기기억이다. 헨리의 사례는 단기기억 기능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기능이 손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장기기억은 학습이 진행되는 동안 기존 시냅스가 강화되거나 약화되며 시냅스에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지만, 단기기억은 그렇지 않다. 헨리는 해마와 편도체를 대부분 잃었기에 감정에 관한 장기기억을 형성하지 못했다. 


연구자 : 누구와 같이 살고 계세요?
H.M : 음, 어머니하고요.
연구자 : 아버지는 잘 모르겠고요?
H.M : 아버진 아팠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돌아가셨나요?
연구자 : 네, 돌아가셨어요.


연구자가 면담 때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1천 번쯤 했으나 헨리에게는 매번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감정의 동요도 크게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면담하면서 메모 한 장을 정성껏 썼다. 

‘아버지는 돌아가심.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지만 건강함.’ 

헨리는 이 메모를 항상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동기부여와 감정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작용으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 불안함을 느꼈다. 이후 연구에서 감정 관련 기억은 다양한 뇌 부위가 동원되어 모든 종류의 감정 경험을 뇌에 저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헨리는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픈 감정을 기억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헨리는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게 되고,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껴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으로 병원에 입원한 헨리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나와 논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요.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생각해요.” 

자신은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도, 장례식을 치른 일도 기억에 없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슬픔을 느낀 것이다.


기억과 뇌에 관한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헨리가 수술을 받은 2년 후, 신경과학자 브렌다밀너Brenda Milner는 하나의 실험을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선을 긋는 것으로, 헨리에게 오각형 별을 선 따라 그리게 하면서 연필이 선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라고 요청했다. 책상 위에 거울을 비스듬하게 세워 자신의 손과 연필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보며 별을 그려야 했다.
 

▲ 거울 추적 검사를 하고 있는 헨리 몰레이슨ⓒhttps://web.bvu.edu/


헨리가 이 과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3일 동안 매일 별 그리기 테스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별 그리기 수행 능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는 테스트 마지막 날, 거울 속에 있는 별 그림을 능숙하게 따라 그린 후 자랑스럽게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참 이상하네요. 내 생각에는 어려울 것 같았는데 제법 잘하지 않습니까?”
 

▲ 헨리는 검사 사실을 기억 못했지만 3일 동안 30번의 시연을 하는 동안 오류가 점점 감소하였다 ⓒBrainFats.org


헨리는 노인이 되면서 보행보조기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어린 시절 먹은 항발작제 약물 부작용으로 골다공증이 생겨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는 걷기가 힘들어졌다. 헨리는 보행보조기를 사용하기 위해 조작법을 익혀야 했다. 그는 자신이 왜 보행보조기를 사용하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새로 익힌 보행보조기 사용법은 기억했다. 즉 같은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건 기억할 수 있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기억 연구에서 중대한 발견이었다. 헨리를 통해 운동 기술이나 학습 능력은 내측두엽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뇌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여기’의 현재에 머문 헨리의 삶

지난 경험은 어떤 것이든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나 모든 결정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기억은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하는 토대이며, ‘나’라는 정체성을 이루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46년간(1962~2008) 연구자이자 보호자로, 또 친구로서 헨리와 함께한 수잔 코킨Suzanne Corkin 박사는 자신의 저서 《영원한 현재 HM》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그가 겪은 일은 틀림없는 비극이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헨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살았다.”
 

▲ 헨리 몰레이슨은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https://suzannecorkin.com/


명상 관련 강연이나 책에서 늘 접하는 ‘지금 여기’에 머무르라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지난 기억과 앞날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명상은 막강한 기억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직 ‘지금 여기’의 현재에 존재해야 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현재에 머물기 위해 심리상담, 운동, 명상 같은 방법을 활용하지만, 헨리 몰레이슨은 원치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거에 대한 회고나 미래에 대한 추측에 얽매이지 않았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만, 30초 만에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헨리가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헨리 몰레이슨은 기억하지 못했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35년간 오로지 30초의 현재로만 살다가 2008년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현재 헨리 몰레이슨의 뇌는 캘리포니아대학 뇌인지연구센터에 보존되어 있다. 
 

글_전은애 수석기자 hspmaker@gmail.com
참고자료_<영원한 현재 HM> 수잰 코킨 저/이민아 역 | 알마 |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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