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짙은 성북동에서 즐기는 바람 한 모금의 여유

녹색 짙은 성북동에서 즐기는 바람 한 모금의 여유

[김양강양의 서울에서 여름나기 - 1] 한성대입구에서 심우장까지

정말, 사소한 말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바지를 입고 온 강양의 모습에 ‘몸빼바지’라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무언가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어느새 성북동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김양과 강양의 서울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그래, 일단 칼국수 한 사발 먹고 시작하자!

 

처음엔 사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 서울에 살고 있지만, 우리처럼 서울 잘 모르는 사람 참 많을 거예요.’ 하지만 막상 취재가 시작되자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푸른 녹음이 우거진 성곽길을 찾아 올라가는 재미가 있지만 사무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축적된 저질 체력이 문제랄까. 한성대 입구역에서 내린 순간 맞이한 구름 희끗한 하늘도 한몫했다. 

 

 

막 취재를 시작한 지라 아직은 활기 띤 발걸음으로 한 십 분쯤 걸었을 때, 칼국수 집이 눈에 띈다. 길치에 암기력도 약한 김양이 ‘나, 저 집 성북동 맛집 리스트에서 본 것 같아요’ 라고 한 말이 문제였다. 둘은 일단 먹고 시작하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나쁜 맛은 아니었다. 빨간 김치와 하얀 면 국수도 괜찮았고, 바지락도 싱싱했다. 다만, 멀리까지 와서 맛집을 기대했다가 우리 동네에서도 먹을 수 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집일 때, 그 허탈감이 문제랄까.

 

옆자리 아저씨가 주문한 콩국수는 직접 콩을 갈아 주시는지 믹서기 소리도 ‘윙~’하고 들렸다. 그리고 슬쩍 넘어다본 콩국수 국물과 면발이 아이보리 색으로 제법 괜찮아 보였다. 뒤늦게 아저씨께 양해 구하고 사진 하나만 찍고 올걸, 하고 후회할 정도로. 일단 칼국수 한 그릇 사이 좋게 나눠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람 한 모금, 미숫가락 한 그릇. 더위를 식히는 수연산방

 


▲선잠단지[사적 제83호] 성종 때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곳. 누에고치를 처음 했다는 중국 상고 황제의 황후, 서릉씨를 누에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었다.

 

원래는 길상사로 바로 갔다가 내려오는 길을 찾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선잠단지를 지나며 동선을 살짝 병경해 수연산방을 먼저 가기로 했다.

 

 

수연산방은 월북한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가옥을 손녀가 찻집으로 고친 집이다. 성북동 쪽에서 일하는 지인이 수연산방의 미숫가루가 그렇게 맛있다고 추천했다. 더울 때 한 잔 쭉 들이켜면 달짝지근한 곡물가루가 힘이 솟게 한다고.

 


▲12곡 미숫가루. 7,500원. 적당히 달곰하면서 고소한 맛이 어릴 때 어머니께서 타주시던 미숫가루 맛이 난다.

 


▲단호박 아이스크림. 8,500원. 매일 직접 찐 단호박으로 만든다고 한다. 시중의 강렬한 아이스크림에 적응된 입맛이라 처음에는 ‘뭐지, 이 밍밍한 맛은?’ 이라고 생각했는데, 먹을수록 단맛이 은근히 입가에 감돈다.

 

추천을 받았으니, 한 잔 해 봐야지 않겠느냐며 찾아가 미숫가루 한 잔을 시키고 단호박 아이스크림도 하나 시키고는 상에 놓여 있던 부채를 집어 천천히 바람을 즐겼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도 앉아 있을수록 참 부러운 거다. 아니 옛날 분들은 어쩜 집도 이렇게 예쁘게 해 놓고 사셨는지. 안방 앞에 있는 시원한 마루에 앉아서 마당을 바라보니, 나무도 아름답고, 집도 아름답고, 저 담장 너머 북악산도 정취가 그만이다.

 

 

때마침 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는 사이 비가 한차례 가늘게 쓸고 갔다. 그러고 보니 수연산방에는 테이블이 6개 정도밖에 되지 않아 3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3시간 이상 앉아 있을 일도 별로 없고, 좋은 사람과 함께 하기엔 매우 좋은 장소다.

 

조선총독부와는 마주보기 싫소.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을 찾아서

 

 

이제 땀도 식었고 비도 그쳤으니 다시 일을 시작하라는 신호인 양 싶어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내셨다는 심우장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옥에 갇혀 있다 나온 만해 선생이 1933년에 지은 집이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는 것이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심우장에는 글씨, 연구 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넓지 않은 심우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빨간 우편함이 눈에 띈다. 다가가서 보니 아하, 스탬프가 들어 있다. 성북동에는 명소를 가면 스탬프를 찍을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뭐랄까. 아무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도장 한 번 쾅! 하고 찍으면 어쩐지 뿌듯해진다.

 

 

심우장을 나와서 북한산 성곽을 가려고 하니 가파른 길이 우리를 반긴다. 길에서 마주친 한 아주머니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더운 여름,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시는 걸까.
(계속)

 

글, 사진. 김효정 기자 manacula@brain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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