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 친일 매국노는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심우장, 친일 매국노는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

[김양강양의 서울에서 여름나기] (1) 성북동 이야기 -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성북동길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한참 오르다 보면 서울명수학교에 다다르기 전 왼편으로 새로 만들어진 듯한 가파른 나무 계단이 있다. 그 옆에 세워진 푯말을 보니 '심우장'이라고 쓰여 있다. 제대로 도착했다.

나무 계단을 다 올랐는데 제대로 도착한 것이 아니더라. 나무 계단을 다 오른 뒤에도 다시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갈림길도 있다. 푯말을 제대로 못 보고 반대로 가면 낭패다. 주의를 기울이고 갈림길에서는 왼쪽 길로 오른다.

그렇게 다시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따른다. 무더운 날씨, 끝없는 골목길을 오르다 보니 생각이 멎는 듯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오르려는 찰나, 하얀 벽과 검은 철제 대문, 검은 문패가 나타난다. '심우장(尋牛莊)',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우치려 공부하는 집이다.

 


 

심우장, 일제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볕도 들지 않는 북향으로 지은 집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숨을 거둔 1944년까지 살던 집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시인인 만해는 일제 치하에서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해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고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활발한 사회활동과 집필활동을 하며 당대의 사상계를 밝힌 독립운동의 등불 같은 존재였다.

만해는 대일항쟁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있는 남쪽을 피해 볕도 들지 않는 북향으로 집을 세웠다. 일제에 돌아서 변절한 지식인들은 심우장 문 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심우장은 지난 1985년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심우장은 성북동의 명소가 되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준다.

면에 4칸, 측면에 2칸에 팔작기와지붕이 올라가 있다. 그가 쓰던 방 곳곳에는 만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글씨, 연구 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원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의 사진이 걸린 방에 들어가 만해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였다. 당시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암송하기가 국어 숙제였다. 술술 읊었던 그의 시였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그를 마주하고 앉은 내 입에서는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만 맴돈다. 멋쩍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당신이 그리도 애타게 원했던 독립된 조국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를 남기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그 옆으로는 누가 만해의 집 아니랄까 봐 무궁화가 곱게 피었다. 마당을 거니는데 대문을 열고 일행 예닐곱 사람이 들어왔다. 한 대학원 국문과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이들은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심우장으로 산책을 왔다고 한다. 만해가 살아있을 때 친일 변절자는 들어올 수 없었던 심우장, 독립 조국에서는 누구나 들어와 바람을 맞고 볕을 쬔다.
그리고 만해를 만난다.

글·사진. 강천금 sierra_leon@li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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