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뜩이려면, 지루함을 즐겨라!

번뜩이려면, 지루함을 즐겨라!

브레인 파워 업

브레인 4호
2010년 12월 08일 (수)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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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라면 눈, 코, 입이 번쩍 뜨일 뉴스가 있다. 아마 눈은 최대한 동그랗게, 코는 약간 벌름벌름, 입은 “아하!” 하는 탄성을 내지를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식이기에 오버의 제곱을 하느냐. ‘순간순간 생이 무료하고 재미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뇌가 번뜩일 신호라는 것.’

물론 당신이 귀차니스트 중에서도 고수라면, 하품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하시겠지. “당연한 소릴 어렵게 하나!” 아무튼 이 소식의 출처는 일본의 저명한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의 저서 《번뜩이는 뇌》의 일부임을 밝힌다. 자, 그럼 지루한 인생들이 창조해내는 번뜩이는 사회미학을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 남모를 씨의 뇌 이야기 

얼마 전 남모를 씨와 술자리에서 그의 남모를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남모를 씨는 귀차니스트 부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30대 후반의 광고기획자이며, 아이의 분유 값을 벌어야 하는 아버지다.

그날은 남모를 씨의 모든 생활이 뒤엉킨 하루였다. 아침부터 시댁식구와의 문제로 잔뜩 틀어진 아내와 한바탕 다퉜고, 공들여 기획한 모 제품의 광고 프레젠테이션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 남모를 씨가 저녁 술 약속 때문에 승용차를 놔두고 전철을 이용해야 했는데, 전철역 레코드 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 때문에 머릿속이 재정리되는 일이 발생했다.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에 이어 아코디언과 피아노 소리가 뒤섞인 이국적인 음색이 몇 해 전 여행 갔던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으로 그를 데려갔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은 가끔씩 바닷물이 범람해 들어오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날도 그랬다. 해질 무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가수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어 익히 아는 그 노래에 맞춰 국적을 가리지 않고 카페에 있던 모든 관광객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국적과 인종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로 어우러진 그날의 감동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 카페에서 아내를 만난 추억도.

순간 남모를 씨의 가슴팍을 짓누르던 묵직한 덩어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흩어지더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시끄럽던 머릿속은 조용해졌다. 음악이 귀에 꽂힌 지 불과 1분 남짓한 동안의 변화였다. 도대체 남모를 씨의 “아하!” 하는 성찰의 번뜩임은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걸까.

# 레코드 가게 앞에서, 자신만이 느끼는 감각

그날 그 레코드 가게 앞에서 그 음악을 들었던 사람은 남모를 씨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모를 씨처럼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도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같은 자극에도 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퀄리아Qualia’를 통해 자극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퀄리아는 ‘감각질’이란 말로 번역되는데 사물을 감각하는 과정에서 ‘무엇 무엇 같다’라는 감각의 특질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나도 붉은 색을 모두 빨강이라고  인식한다. 이때의 빨강이라는 감각의 질이 바로 퀄리아다.

세계는 뇌 속으로 그 정보가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감각을 통해 다양한 감각질의 상호작용과 통합의 형태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처럼 타인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타인이 관찰할 수도 없는 의식의 주관성을 갖고 있다. 즉 매순간 나만의 퀄리아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커피의 짙은 향기, 씁쓸한 맥주의 맛, 우울한 첼로 소리 또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퀄리아다.

남모를 씨는 레코드 가게 앞에서 음악을 듣는 순간 남모를 씨만의 퀄리아를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이 느끼는 이 감각, 퀄리아에 집중할 때 번뜩임으로 이어진다.

# 산마르코 광장, 기억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능력  

단순히 기억을 재현하는 능력이 아니라 기억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음악을 듣는 순간, 남모를 씨의 뇌는 산마르코 광장에서 체험한 퀄리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국적과 종교, 언어를 떠나 하나로 소통할 수 있었던 감동 체험으로  의미부여 되어 편집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남모를 씨처럼 측두엽에 기억을 보관하고 있다가, 번뜩임이 필요한 적절한 시기에 전두엽에서 기억을 떠올린다. 이렇게 번뜩이는 과정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측두엽과 의식에 해당하는 전두엽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 커뮤니케이션은 외부 정보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을 때 활발하게 일어난다.

# 음악, 뇌를 공백 상태로 만들어준 계기 

음악은 온갖 정보로 가득 차 있는 남모를 씨의 뇌를 순간 공백 상태로 만들어주었다. 즉 음악에 담긴 정보 자체가 번뜩임을 촉진시키는 특별한 성질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음악이 주는 휴식이 뇌에 공백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 상태에서 측두엽에 저장된 소중한 퀄리아를 전두엽이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뇌는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다소 지루한 시간과 공간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지루해지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뇌는 자발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러니, 그것이 사소한 아이디어이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이든, 아니면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각이든, 번뜩임이 필요한 당신, 잠시 바쁜 일 접어두고 지루함 속으로 들어가라. 거기에서 남모를 씨처럼 온전히 ‘지금’에 집중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감각질 퀄리아를 체험하라.    

글·곽문주
joojoo4981@naver.com | 참고도서·《번뜩이는 뇌》 모기 겐이치로   
일러스트·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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