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간의 의식이나 생각이 전적으로 뇌의 생물학적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지난 11월 4일 방한해 ‘의식의 과학적 탐구 ; 철학적 장애를 넘어서’ 란 주제로 공개강연과 세미나를 가졌던 다니엘 데닛 (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장) 박사는 “그렇다”고 단언한다.
인지과학을 이끌어온 다니엘 데닛 박사는 인간의식은 속임수를 동반한 마술쇼라며 그 신비화를 비판하고 “인간의식은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과 유사하며 생물학적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해왔다.
그동안 인간의식을 둘러싼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비화를 비판해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었습니다. 출산을 예로 들면 지난 몇 백년동안 그것은 마술적이고 미스터리적인 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신진 대사, 성장 등등도 처음엔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으로 보였던 생물학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마술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과정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왜 ‘뇌’라는 영역이 그것과 달라야 합니까? 왜 ‘마음’이 그것과 달라야 합니까?
인간의 전체를 포함하는 통합된 과학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학은 인간의 마음도 포함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마음’이라는 영역도 자연 과학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얘기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반대 의견을 보면 그 논리가 잘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학자로서의 제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의식의 과학적 연구에 장애가 되는 의견들을 반박함으로써 이 소중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뇌 기능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고 존중감을 받는 상태에서는 뇌 기능이 활성화되는데 기분이 나쁠 때는 뇌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경우는 이러한 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 뇌는 감정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감정은 온몸이 관련되는 일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목이 잘려 뇌만 남는다면 그 사람은 감정이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도 마찬가지로 감정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미래에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현재 MIT의 로드니 브룩스(Rodney A. Brooks, MIT인공연구소장)박사의 코그(Cog)프로젝트팀에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코그는 인간 로봇입니다. 코그를 제작하던 초기부터 우리는 코그가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코그는 통증 뿐 아니라 지루함, 두려움, 호기심, 보호받는 감각을 느낍니다. 아마 미래에는 이처럼 감정이 있는 로봇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
학습을 통해서만 인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양에서의 깨달음이나 직관과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 여러 가지 이슈를 생각할 수 있게 하므로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실질적으로 인지를 위해서 학습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의식세계 코드를 모두 넣어 디자인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로봇을 만든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학습능력이 있는 로봇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러면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학습과정과 동양에서 말하는 직관은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직관은 또 다른 종류의 인지능력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성적인 인지과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관을 얻을 때의 과정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13이 얼마죠? (기자 : 39요)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알았죠? 기억을 했나요? 아니면 곱셈을 빨리 머리 속에서 했나요? (기자 : 곱셈을 했습니다) 그러면 한국말로 book 이 뭐죠?(기자 : 책입니다) 어떻게 알았죠?(기자 : 음, 기억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죠? 그냥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직관입니다. 어떻게 뇌가 그 일을 수행했는지 모를 때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 부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뇌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직관이란 어떤 지식이나 정보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알게 될 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잠에서 깨면서 갑자기 ‘내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라고 했을 때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릅니다. 그냥 머리에 떠올랐어요’라고 말할 때 그건 초능력일 수도 있고 영능력일 수도 있지요. 이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이게 바로 직관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강한 느낌이나 신념, 혹은 그 사실을 믿는 나를 발견할 때 ‘내가 왜 이 생각을 하고 있지?’라는 자문에 ‘그냥 생각이 나네요’하는 것, 이게 직관입니다.”
창의성은 어떻게 설명이 되나요. 그것은 생물학적인 결과인가요 아니면 훈련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인가요.
“2000년도 미국 철학 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할 때 저의 강연의 주제가 바로 창의성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많은 사람들이 창의성이 설명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창의성이 신비에 싸여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기분이 더 좋습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래도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 방식은 진화론적인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의성을 좋게 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창조성 개발이 어느 정도까지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미술가, 작곡가, 과학자, 시인이건 간에 모든 발명이나 창조 과정은 결국에는 컴퓨터 공학 용어인 ‘생성과 시험’의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양보다 휠씬 많은 양의 뉴런(신경 세포)을 만들어 냅니다. 보통 사용할 수 있는 양보다 10배의 신경 세포를 만들어 내죠. 신생아들은 생후 1개월 된 아기보다 2~3배의 뇌 세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세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테스트 당하고 버려진 것입니다. 필요량보다 휠씬 많은 양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골라내는 것, 바로 그것이 생물학적 창조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인지적인 창조도 또한 마찬가지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피카소 같은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은 그가 천재이기 때문에 어떤 시행착오도 겪지 않고 그런 천재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천재적인 사람의 뇌도 위의 과정처럼 많은 후보들을 생성해 내고 , 테스트 하고 버리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이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똑같은 과정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통찰력이 있다면 말도 안 되는 후보를 많이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최고의 후보만 놓고 볼 것입니다. 작곡가나 소설가 그리고 과학자들까지도 스타일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바하라면 헨델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스타일이란 것은 생성되는 많은 후보의 폭을 좁혀 놓은 것을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좋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후보 중에서 그러한 스타일로 선택의 폭을 줄여나갑니다. 이것이 창조를 하는 데에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완전히 열린 영역에서 창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스타일로 그 선택의 영역을 좁힙니다. 이 과정은 사람들 개개인이 컨트롤할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 쇼팽은 그의 스타일이 어떻게 될지 컨트롤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창조 과정에서 하나의 채널로 선택 영역을 좁히면서 나온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채널이죠. 창조성이 뇌의 한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뇌 피질, 대뇌변연계 등등에 다 분배된 것입니다. 한 군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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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나 의식은 뇌로부터 연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물론 온 몸과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환경도 포함합니다.”
한국뇌과학연구원장 이승헌 박사는 “한 개인의 뇌 속에 어떤 정보가 들어있고 어떤 정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결정되고 인류의 집단적인 뇌 속에 어떤 정보가 들어있느냐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며 뇌를 몸을 훈련하듯이 잘 훈련하면 좋은 정보처리를 하게 되고 세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과 직관을 갖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저는 교육이 바로 이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교육은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평상시 불가능하다고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보게 되고 우리 자신의 실수를 보게 됩니다.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이 바로 학습의 핵심입니다.”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적대적이라고 비판받는(기자 주-유물론적 접근이라는 이유로)존엄성을 구하기 위한 시도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한 관점만이 인간의식, 창조성, 자유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서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 과학이 정신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자연 과학이 인간 영혼의 가치를 줄여서 하나의 기계로 만들어 놓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려움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영혼(soul)’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 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의자가 슈몰(shmoll) 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슈몰이 뭡니까? 모릅니다. 그러나 슈몰이 있는 의자에는 앉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슈몰이 그 의자를 존엄하게 하기 때문이랍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소울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인간을 존엄하게 한다는 생각이 왜 받아들여져야 하나요?
저는 인간을 진실로 존엄하게 하는 것은 서로의 고통과 가능성과 창의력을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당신은 내가 상상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희망을 나누고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함께 고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소중하고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아주 명확한 답이 과학적인 접근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적인 각도에서 보았을 때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보다 휠씬 명확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어떤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더 잘 이해할수록 그 현상은 더 경이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페라리 자동차를 본다고 합시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우리는 무엇이 페라리를 아름답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후드 밑을 열어 엔진을 보고 그 엔진이 어떤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부속품이 어떻게 디자인 되어 있는지를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정말 훌륭한 자동차와 겉만 번드르르한 차를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 데닛 박사는 두 차례의 공개강연에서 의식이 과학을 넘어선 신비라고 인식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의식의 객관적 탐구를 위해 ‘삼인칭적 접근법(Heterophenomenology)’을 끌어들였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들었다고 인식한 것을 발화하는 지점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작으로 뇌의 내부로 들어가 의식의 상태를 종합적인 그림으로 나타내보는 것이다. 의식은 나 혼자만 알 수 있다는 1인칭적 접근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접근해야 의식형성 과정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데닛 박사는 공동 저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란 책에서 “화성에서 우주선이 파손되어 위기에 몰린 여성이 텔레크론이란 공간이동장치를 통해 지구로 돌아온다. 화성의 텔레크론 안에서 그의 육체는 분해되고 청사진만이 전송되어 지구의 텔레크론 장치 안에서 재조합된다. 그의 기억은 이전과 다름이 없지만 그는 이전의 바로 그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이번 공개강연까지 이어진 그러한 질문은 이전까지 익숙했던 관습의 지식을 뒤엎으며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민케 한다.
글. 지은주 기자 asaac@powerbr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