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Nell'과 실어증

'넬Nell'과 실어증

뇌 의학자가 본 영화

뇌2004년2월호
2010년 12월 07일 (화)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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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 짓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다른 동물들에게 언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원숭이는 약 36가지의 언어 표현 수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언어는 매우 단순한 수준이다. 그저 땅으로부터 뱀이 기어오를 때 ‘올라가’, 독수리가 날아다닐 때 ‘내려가’ 라고 동료들에게 소리치는 정도이다. 복잡한 개념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이처럼 발달된 언어를 가지고 있기에 상호간 다양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고등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가 인간에게 행복만을 준 것은 아니다. 언어의 이면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침묵은 금이다’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복잡한 언어가 없었던 옛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더 행복했을까? 아니면 문제가 많더라도 언어를 구사하는 ‘문명인간’인 편이 더 좋은 것인가? 마이클 앱티드 감독의 영화 ‘넬’ (1994)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를 천작하기 위한 소재로 감독은 뇌 질환 증세의 하나인 ‘실어증’을 도입하고 있다.


인간이 복잡한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는 동안 언어담당 신경세포는 뇌의 왼쪽에 ‘언어 중추’의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언어 행위가 완전히 왼쪽 뇌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말 하는 도중의 억양, 감정 표현 같은 것은 오른쪽 뇌가 관여한다. 즉 언어 행위를 하는 동안 우리는 양쪽 뇌를 동시에 사용한다. 하지만 주된 언어 중추가 왼쪽 뇌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어 중추가 뇌졸중 같은 병에 의해 손상되면 언어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를 ‘실어증1) ’ 이라 한다.

실어증과 감각성 실어증

언어 중추의 앞쪽은 말을 구사하는 역할을 하며, 뒤쪽은 남의 말을 알아듣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뇌 손상의 위치에 따라 실어증 증세는 약간씩 달라진다. 언어 중추의 앞부분이 손상되면 남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증세를 ‘운동성 실어증’이라 부른다. 이들에게 ‘손을 들어보세요’ 하면 손을 든다. 하지만 ‘이름이 뭐예요?’ 와 같은 간단한 질문에도 쩔쩔매기 일쑤이다.

반대로 언어 중추의 뒤쪽이 손상되면 자신은 중얼중얼 말할 수 있지만 남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손을 들어보세요’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런 증세를 ‘감각성 실어증’이라 한다. 언어 중추가 모두 손상되어 말을 할 수도, 남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전 실어증’이라 부른다. 자, 실어증에 관해서는 이 정도 해두고 이제 영화 넬의 줄거리를 더듬어 보자.

좀처럼 사람이 찾지 않는 수풀이 무성한 골짜기, 잔잔한 강물만이 흐르는 외딴 지역 오두막집에서 한 여자가 사망한 것을 식료품 배달부가 발견한다. 보안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마을의 가정의家庭醫 제리 로벨 (니암 리슨 역)은 그곳으로 향한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그는 오두막 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괴성을 질러대는 한 소녀 (조디 포스터 역)를 발견한다.

이때 제리는 집안에 있던 성경에 쓰인 메모를 발견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이리로 인도하셨습니다. 나의 넬을 지켜주세요” 괴상한 말을 사용하는 야생녀 넬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보호 감정이 생긴 로벨은 넬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넬이 외딴 곳에서 사람이라고는 자기 어머니밖에 접촉해 보지 못하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이상한 언어는 외부인과 차단된 채 언어 장애가 있는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자란 결과일 수도 있다.

제리는 언어 심리학자 폴라 올슨 (나타샤 리차드슨 역)에게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넬에 관해 조사하기로 결정한 제리와 폴라는 넬의 오두막집 가까운 곳에 간이 연구소를 짓고 연구를 시작한다. 제리는 넬의 이상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넬과 함께 하면서 그녀의 언어를 서서히 배워가던 중 비디오 촬영과 녹음으로 넬의 언어를 분석하던 폴라는 넬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름아닌 ‘영어’라고 단정짓는다. 물론 넬의 엄마가 구사했던 ‘잘못된’ 영어였다.

어느 날 넬은 그들에게 숲 속에 숨겨진 작은 유골을 보여준다. 제리와 폴라는 넬에게 어려서 죽은 메이라는 쌍둥이가 있었고, 둘은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했음을 알게 된다. 넬의 엄마는 뇌졸중에 걸려 ‘안면 마비’와 ‘실어증’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한 후 세상이 무서워져 이 외딴 곳에서 어린 쌍둥이를 길러왔던 것이다.

환자들이 보이는 착어와 신조어

넬의 언어를 분석해 보자. 이미 말했듯 넬의 언어는 영어의 ‘조각’이다. 예컨대 넬이 ‘스피’ 라고 말하는 것은 ‘스피크’라는 의미이다. 이런 영어를 엄마로부터 배웠다면 넬의 엄마는 운동성 언어장애 환자였던것 같다. 이때 환자는 말을 구사하기가 힘들며 흔히 발음이 어둔해진다. 종종 이들은 단어를 끝까지 발음하지 못한다. 즉 엄마는 ‘스피크’ 라는 말을 못해 ‘스피’ 까지 한 것이고 넬은 이를 ‘스피크’의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영화 속에서 넬은 ‘마사’를 ‘작다’는 뜻으로 ‘어나’를 ‘크다’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세상에 이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어증 환자들은 종종 이처럼 말을 이상하게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지갑’을 ‘자갑’ 이라 하는 경우인데 이런 현상을 착어(paraphasia) 라고 한다. 착어 현상이 심한 경우는 아예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지갑’을 ‘디다’라고 하면 그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실어증 환자가 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는 현상을 ‘신조어(neologism)’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넬의 엄마는 언어능력은 정상이나 발음에만 이상이 있는 ‘발음장애’가 아니라 언어 능력 자체가 소실된 실어증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보면 전문가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만다. 넬의 엄마가 보였던 언어장애의 증상을 다시 종합해 보자. 잘못된 언어 규칙을 갖고 있다 해도 아이의 말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였다면 엄마의 증세는 운동성 실어증일 가능성이 높다. 불완전한 발음, 그리고 안면마비를 함께 보였던 점2) 또한 이와 같은 진단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착어와 신조어이다. 물론 운동성 실어증 환자도 착어증세를 보이기는 한다. 가령, ‘탁자’를 ‘착자’와 같이 발음할 수 있다. 이처럼 글자 하나를 잘못 발음하는 경우를 ‘음소 착어’라 한다. 하지만 ‘탁자’를 아예 다른 관련어인 ‘소파’ 같은 단어로 대치하거나 (이런 현상을 ‘의미 착어’라 한다) ‘마사’, ‘어나’ 같은 신조어를 나타내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심한 감각성 실어증 환자에게 관찰된다. 즉 넬의 엄마는 심각한 감각성 실어증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가 불가능했어야하는 모순에 다다른다.

뿐 만 아니다. 영화는 이러한 실어증 환자와 함께 고립되어 성장한 어린이가 그런 불완전한 언어를 학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가장 반짝이는 아이디어이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는 점을 짚어주지 않을 수없다. 일반적으로 실어증 환자들의 착어나 신조어는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신조어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즉, ‘작다’는 의미로 ‘마사’라는 말이 한번 튀어나왔다고 해서 다음번에도 같은 의미로 ‘마사’라고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린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관적이고 반복적인 언어 자극이 주어져야 하는데, 어머니의 착어 현상을 통해 넬이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정도로 심한 실어증이 있는데도 성경책에 글을 잘 써 놓은 점 역시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글쓰기 능력은 언어 구사 능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반 관객들을 골치 아프게 할 의도는 없다. 단순히 넬의 엄마는 뇌졸중에 의해 왼쪽 뇌의 언어중추가 손상되었고 그로인해 심각한 실어증이 있는 상태라는 정도로만 해 두자.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병

그리고 이쯤 해서 영화가 관객들에게 줄기차게 던지고 있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처음으로 문명인에게 노출된 넬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제리는 이 장소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넬을 지금처럼 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폴라는, 넬은 말하자면 제대로 인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희생양이므로 도시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으로 둘이 옥신각신 하고 있을 즈음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는 ‘야생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고 이 평온하고 한적한 지역은 TV 방송국 헬기가 출현하는 등 시끄러워진다. 제리와 폴라는 넬이 문명 세상과 익숙해지도록 그녀에게 대도시 이곳저곳을 구경시킨다. 하지만 세상은 이 야생녀에 호의적이지 않다. 당구장에 들어간 넬에게 불량배들은 가슴을 노출하도록 꼬드기고, 권위 있는 대학병원의 의사는 넬을 병원에 가두어 놓고 연구하려고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넬을 가장 열심히 돌봐준 사람은 물론 제리이다. 제리는 오랜 동안 가족이 많은 친구들을 부러워해 왔던 고독한 외아들이었다. 따라서 문명사회와 떨어져 홀로 남은 넬에 대해 동질감을 갖게 된 것이다. 폴라 박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지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이던 그녀 역시 13세 때 아버지가 떠나 홀어머니 아래서 자란 불행한 과거가 밝혀진다. 문명사회에 발을 디딘 넬과 첫 눈에 공감을 형성한 여자는 보안관 피터슨의 아내 메리. 그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영화에 안 나오지만 아마도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하다. 그 둘은 한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깊이 이해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고상한 언어를 구사하는 현대인, 고층 빌딩에서 사는 문명인들도 실은 외로움, 가족 해체, 우울증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말을 못하지만 고요한 숲과 흐르는 강물처럼 천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넬이 이들 모두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존재로 부각된다. 넬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숨긴 채 다투고만 있는 제리와 폴라를 연결해 이들의 마음을 서로 통하게 하기도 한다.

문명의 조화가 해답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야생녀로 살아 갈 수 없게 된 넬이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은 정신병원뿐이다. 그녀는 법정청문회 때까지 병원에 수용되는 처지가 된다. 이때 의사들이 넬을 실험동물로 간주한다고 생각한 제리는 병원에서 그녀를 납치해 모텔로 빼돌린다. 그러나 모텔에서의 둘의 동거는 일시적일 수 밖에 없다. 넬은 서서히 인간사회에 눈을 뜨고, 법정에 선 그녀는 제리에게 통역을 부탁해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의 문명과 언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지만, 넬과 바깥세상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길은 역설적으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었던 것이다. 결국 넬은 문명사회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즉 이 영화는 언어가 없는 야생 자연 보다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언어와 문명이 존재하는 사회를 인간이 살아가야 할 터전으로 본 것이다.

 5년 후,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둔 제리와 폴라가 넬의 오두막에 찾아온다. 넬은 생일을 축하하러 온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다. 물론 이때 넬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그녀의 천진한 모습은 예전과 똑 같다. 그런 넬과 더불어 아름다운 강물에 반짝이는 햇살은 자연과 조화되는 건강한 문명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글│김종성  jongskim@amc.seoul.kr  울산대의대 서울 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1) 목구멍, 혀, 혹은 얼굴 근육의 마비에 의한 발음장애 (dysarthria)와는 다른 증상이다. 실어증 (aphasia)은 언어 능력 자체가 소실되는 증세를 말하며 뇌를 손상시키는 모든 질환 즉 뇌졸중, 종양, 염증, 손상 등에 의해 발생한다. 이중 뇌혈관질환인 뇌졸중이 가장 흔한 실어증의 원인이다.
2) 일반적으로 운동성 실어증 환자는 감각성 실어증 환자에 비해 얼굴이나 팔, 다리의 마비를 동반하는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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