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외로운 동물이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포유류는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네 발로 걸어 다닌다. 오직 우리 인간만이 휘청휘청, 위태롭게 두 발을 휘저으며 딱딱한 시멘트 위를 걷고 있다. 우리 몸통에 매달려 허공에 내질러지는 두 손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더욱 외롭게 한다. 7백만 년 전, 영장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우리는 사자가 이빨을 날카롭게 가는 동안, 기린이 목의 길이를 늘이는 동안, 영양이 빠른 뜀뛰기를 연습하는 동안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며 대뇌를 크고 무겁게 진화시켰다.”
서점에서 <뇌에 관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집어 들고 머리말을 읽어 내려가다가 다시 책 앞날개로 돌아가 저자의 이력을 확인했다.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과장 김종성 교수. 정보의 나열이 아닌 학자로서의 시각과 언어가 살아있는 대중과학서를 만나기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월간 뇌 독자들은 올해 거의 매호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특별기고, 연재, 일회성 청탁 등 계속되는 우리의 노크에 응답해준 그에게 감사하며, 독자들이 진작 만나고 싶어 한 베스트 필자에게 마침내 인터뷰를 요청했다.
# 논문 많이 쓰는 의사
“환자의 다양한 증세를 관찰하고, 논문을 읽고, 배우고 가르치는 도중에 생기는 수많은 의문의 조각들. 나는 이런 조각들을 짜맞추기 위해 환자를 안 보는 시간을 틈타 데이터를 수집하고 논문을 쓴다. 그동안 거대한 해변에서 조약돌을 하나씩 줍듯 논문을 써 왔고, 그러다 보니 내 분야에서는 꽤 이름도 나고 학술상도 몇 차례 받곤 했다. 하지만 내 전공인 신경과학에 대한 나의 생경함은 여전하다”
서울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1991년부터 지금까지 12년 동안 그가 쓴 논문은 총 1백90편이다. 이 가운데 국외 논문이 1백6 편. 신경과에서 외국 학술 저널에 논문을 게재한 경우도 그가 처음이었다. 1년에 15편 이상의 논문을 쓴 셈인데, 의사로서 연구를 이처럼 열심히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마치 인문학자처럼 답한다.
“삶을 움직이는 두 가지 동력은 사랑과 분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인생을 많이 사랑하는가 보다. 무엇엔가 호기심을 갖고 그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규명해내는 것이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분노의 동력도 작용한다. 서구 학문의 침략 속에 그냥 있을 수 없다, 내 현실이 답보 상태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 사랑이 먼저인지 분노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논문 쓰기가 일면 ‘중독’ 상태에 이른 것 같다고도 한다. 대개 여러 개의 논문을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에 외국 저널에 보내놓은 논문 상황을 체크하느라 우편함과 이메일을 수시로 확인하는데, 한동안 이런 일이 뜸하면 공허감마저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치열한 연구 노력의 성과로 2000년대 들어 그의 이력서 수상 경력란은 해마다 한 줄씩 늘고 있다. 함춘의학상(2001)과 우수의과학자상(2002)에 이어 올 11월에는 제 13회 분쉬의학상을 수상했다. 분쉬의학상은 구한말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 상을 집행하는 대한의학회에서는 김종성 교수가 뇌졸중 때문에 발생하는 감각장애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국내에서 발생하는 뇌졸중의 위험인자와 원인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라고 선정 이유를 발표했다.
# 신경과 의사가 되다
“이상적인 인간이란 뇌가 가장 발달한 사람이다. 그는 후두엽에서 받아들이는 시각 자극을 두정엽에서 조리 있게 판단해내고 측두엽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발달된 전두엽으로 그 모든 것을 냉철히 조절하는 사람이다. 그는 측두엽이 발달했기 때문에 맛과 냄새에 예민하며, 측두엽을 통해 듣고 후두엽을 통해 보는 정보는 그가 경험해 왔던 즐거움과 고통의 경험과 맞물려 음악과 미술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갖도록 했다”
어릴 적 동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초등학생 때 동물에 관한 책을 쓰려고 했다 한다. 그렇다면 그의 거실에는 큰 수족관이 놓여 있고 그 주변을 몇 마리쯤의 개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풍경이 쉬 연상되는데, 그는 집안에 아무 것도 기르지 않는다. 묶거나 가둬 놓은 채로 먹이고 쓰다듬어 주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을 좋아했던 흔적은 그의 글에서 인간의 진화를 설명할 때 속속 등장하는 여러 동물의 생태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는 어떤 장식도 없이 그저 자료 더미들만 수북한 연구실 컴퓨터에 잡지에서 오려낸 동물 사진 몇 장이 붙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리와 장식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로서는 대단한 성의 표시임에 틀림없다.
공부 말고 다른 이력을 자꾸 캐물으니 마지못해 조금 꺼내 보인다. 클래식 기타, 사군자, 붓글씨 등에 몰입했던 한 시절을. 연주회와 전시회를 여는 정도까지 정진했지만 그 분야에서 프로페셔널이 될 수는 없다고 느꼈다. 이후 서서히 그의 집중력을 사로잡은 새로운 대상이 바로 ‘뇌’였다. 그때부터 공부에 파고들기 시작했고, 십 년 동안 차츰 나무 위로 올라 이제는 나무 아래의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한다.
# 글 잘 쓰는 의사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조금씩 또 다른 의미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논문을 써도 마치 떠나간 애인에게 못 다한 말처럼 늘 미진한 무엇이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요즘 와서야 깨달았지만 이것은 나 자신이 뇌에 관한 논문을 쓰는 동안 정작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환자의 병은 열심히 치료했으나 정작 환자 본인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것과 같다.”
2000년에 나온 그의 책 <뇌에 관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의 첫 장 ‘잠은 왜 잘까’ 편이 지난해부터 중학교 2학년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훌륭한 저서를 쓴 과학자는 예외 없이 뛰어난 과학자이다. 갈릴레이, 뉴턴, 다윈, 프로이드, 슈뢰딩거, 제임스 왓슨,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 뛰어난 과학자가 되려면 탄탄한 글쓰기가 반드시 밑받침 되어야 한다는 표현이 더 타당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공과대학으로 꼽히는 미국 MIT 부근 서점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작문책이라 한다.
그는 평소에 조금씩 글을 써둔다. 토요일 오후나 명절 연휴 같은 때에. 그러다가 3년 전 의약분업 정책에 반대하며 의료계가 장기 파업에 들어가자 그는 드디어 앉아 집필의 속도를 올렸고,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뇌에 관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다. 이 인터뷰 기사의 중간제목 아래 인용된 글들도 그 책에서 따온 것이다. 올 겨울이 지나기 전에 뇌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을 낼 예정이라 하는데.
“한 권의 책이 될 만큼의 글을 쓰고 나면 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더 이상 쓸 것이 없을 것 같고. 하지만 생각이 계속되는 한 글쓰기를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일과 휴식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내린 휴식의 정의는 ‘무엇에든 집중해 있는 상태’이다. 글쓰기, 논문 쓰기, 강연, 영화 보기, 책 읽기 등이 그래서 그에겐 다 휴식일 수 있다. 그래도 운동은 별도로 한다. 매일 3.5km 달리기.
# 그런데 내가 의사인가
“어찌된 일인지 ‘의사’라는 단어는 마흔 중반이 넘어가는 내게 아직도 낯선 단어로 다가온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의사선생님’하고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부르나 보다 하고 그냥 지나칠 것 같다. 의사란 단어가 내게 생경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전공하는 신경과학이 너무나 광대한 우주처럼 내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맹장을 잘라내어 하나의 치료를 완결할 수 있는 외과 의사였다면 어쩌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방대한 신경과학의 세계에서 내가 아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내가 환자에게 해주는 치료란 또한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사보다 작가에 가깝게 규정해 놓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괴리감이나 편중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는 글을 쓸 때는 물론, 환자를 대할 때나 연구를 할 때도 ‘작가정신’으로 임한다. 이는 그의 표현이다.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기를 즐기는 그의 ‘작업들’은 작가정신에 의해 꾸준히 의학적 창조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의사이다
“의사란 우리 사회에서 별로 나쁘지 않은 직업이다. 적어도 남을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중 내가 만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는데, 이처럼 인사를 많이 받는 직업도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목사님이나 스님은 병든 영혼을 고치시겠지만 나는 나의 진단과 치료 행위가 좀더 구체적이란 점에서 의사가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는 2001년, 2002년 연속 뇌혈관질환 분야의 동료의사들이 뽑는 ‘베스트닥터’ 1위에 선정되었다. 지난해 대한의사협회에서 노벨의학상이 기대되는 한국인 의학자로 거명되기도 했다. 의사로서 외부의 인정을 명백히 받고 있으니 자신의 내부에서는 더 자유로운 정체성을 꿈꿀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러나 꿈의 과녁이 의학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는 앞으로 연구의 초점을 뇌의 메커니즘에서 질병 치료에 더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쪽으로 옮겨가겠다 한다.
그는 뇌졸중 뒤에 나타나는 다양한 감각장애와 뇌간에서 생기는 뇌졸중 연구에 특히 독보적이다. 뇌졸중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질병이니 이 분야의 명의를 만났을 때 한마디 들어두어야 하지 않겠나. 더구나 겨울철이면 발생 빈도가 크게 올라간다니.
“뇌졸중 치료약은 아직 없지만 환자의 상태를 더 좋게 하는 방법은 분명 생길 것이다. 뇌졸중은 ‘생활습관병’이라고 불릴 만큼 예방이 중요하다. 그래서 뇌졸중은 노인의 병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문제이다. 뇌졸중의 원인인 뇌혈관 손상은 30, 40대부터 시작된다. 암은 예방법을 잘 모르지만 뇌졸중은 위험인자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혈관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식습관과 적절한 운동, 정기 건강검진 등을 잘 지키면 예방이 가능하다.”
# 이상적인 또는 탁월한
“전두엽과 측두엽을 함께 사용하는 그의 일생은 기쁨과 고통의 순간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으며, 사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바로 그런 감정으로 바라본다. 그는 돈을 많이 벌거나 오래 살려고 욕심내지 않으며,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을 창조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데 관심을 둔다. 겉보기에는 결코 요란하지 않은 그의 내면은 자신감에 차 있다. 그는 닥쳐오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솔선해서,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어려움이야말로 자신을 훈련시키는 좋은 기회이며 우리가 위대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계기임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 ‘이상적인 인간’의 일부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자신의 자아상이 투사되었을 테고, 그의 삶이 이상적으로 충실하게 진행된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탁월한 의사이자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됨을 의미한다.
글│방은진 jeena@powerbrain.co.kr 사진│김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