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놀이의 진수, 허공자세

시체놀이의 진수, 허공자세

브레인 콘서트

뇌2003년10월호
2010년 12월 23일 (목)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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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티즌들 사이에 시체놀이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공중파에서는 개그맨 이정수가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며 처음 선보였지만 원조는 따로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에서 짱구가 즐겨하는 놀이가 있었으니, 나무늘보놀이(나무늘보처럼 나무에 찰싹 붙어 있는 놀이)와 굼벵이 놀이(굼벵이처럼 바닥을 기는 놀이)에 이어 바로 이 시체놀이였다.








시체놀이의 원조는?

시체놀이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죽은 척 널브러져 있는 자세 혹은 행위를 의미한다. 이 놀이는 꽤 오랫동안 천성적으로 드러눕기 좋아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신봉하는 네티즌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향유되어 오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컴퓨터를 통해 여러 사람에게 공유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이 시체놀이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간 시체놀이는 인터넷이 낳은 컴퓨터 폐인들의 유희로 각광받아 왔는데, 그들의 혼자 놀기 시리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판무늬세기, 신문 글자 오려서 애국가 4절까지 만들기, 동전 테두리의 홈 세기, 고무장갑 불기, 발가락으로 종이접기, 휴지 한 장의 엠보싱 개수 세기, 조리퐁 개수 세기(실제로 조리퐁 과자에 들어있는 알의 개수는 대략 1천6백47 개라고 한다) 등 다소 엽기적일 정도다. 그들이 말하는 시체놀이의 효험은 이런 것이다. 우선 방바닥에 꼼짝 않고 누워있으면 머리가 비워져 정신수양이 된다, 시간은 남아돌고, 몸을 움직이기는 귀찮을 때 시간 때우기에 안성맞춤이다, 꼬마들에게 시체놀이를 하자고 한 뒤 조용히 재울 수 있다 등등.

‘혼자놀기’에서 같이 즐기는 놀이로 

그러나 혼자 놀기의 진수였던 시체놀이는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면서 급속히 공동의 놀이로 전환됐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시체놀이 이미지가 거의 단체사진인 것만 봐도 그렇다. 이뿐 아니다. 온라인에서 ‘우리끼리’ 돌려보던 시체놀이는 급기야 명동 한복판이라는 컴퓨터 밖 세상에서 재현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9월 20일 오후 7시 서울 명동의 한 패션몰 앞. 하얀색 털모자와 목도리를 두른 한 청년의 지시에 따라 주위에 있던 젊은이들이 일제히 시체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고, 그 중 일부는 쓰러진 이들을 흔들어 깨우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동도 않던 이들은 1분이 지나자 벌떡 일어나 환호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군중 속으로 뿔뿔이 사라졌다.

요즘 세계적으로 젊은층 사이에 급속히 퍼져간다는 ‘플래시몹(Flash Mob: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리더의 지시에 따라 동시에 이상한 행동을 하다 해산하는 집단 해프닝)’이 한국에서 벌인 시체놀이 퍼포먼스였던 것. 이쯤 되면 시체놀이는 이제 개인의 유희에서 여럿이 함께 즐기는 공공의 놀이로 승화되고 있다 해야 할까. 문화평론가 김지룡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엉뚱한 행동은 혼자 하면 미친놈이 되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하면 퍼포먼스가 된다. 놀이는 그 시대의 문화와 집단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우주심에 이르는 허공자세

사실 필자에게도 시체놀이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불명확했던 20대 초반에, 스스로 개발(?)해 즐겼던 놀이 중의 하나가 일테면 ‘시체놀이’였으니. 당시의 시체놀이는 사뭇 경건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방법은 대강 이렇다.

1. 푹신한 담요를 바닥에 깔고 얇은 이불을 준비한다.
2. 편안히 자리에 누운 후 이불을 덮는다.
3.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몸에 집중한다.  
4. 몸이 충분히 이완되면 모든 신경을 하나하나 잠재우는 주문을 외운다. 그 주문은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다”이다.

일말의 자폐증적인 행동양태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어찌됐건 주문의 효력은 상당했다. 주문을 외우는 동안 찌든 때처럼 끼어 있던 근심과 불안이 서서히 증발됨과 동시에 몸은 수천 미터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완전히 이완된다. 세포 하나하나가 삶의 짐을 덜어낼 즈음 몸은 한결 가벼워지고 의식은 나른해져 비로소 잠의 나락으로 쿵!하고 떨어지는 것이다. 이 시체놀이의 장점은 삶의 스트레스로 인해 예민해진 신경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인데, 한잠 깊게 자고 나면 거짓말같이 세상이 말갛게 보이고, 새로운 기운이 충전되곤 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차마 죽음을 택하지는 못하고 특별한 의식처럼 치뤘던 ‘시체놀이’가 요즘 세상에선 누구나 즐기는 놀이로 보편화되었다니, 글쎄, 만감이 교차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시체놀이’가 인터넷 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수행법이라는 사실이다. 단학에서는 ‘허공자세’라 불리고, 요가에서는 공교롭게도 이름도 비슷한 ‘시체자세’라는 동작인데, 주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이완할 때 취한다. 이는 호흡에 집중하면서, 일상의 모든 번민과 스트레스를 놓고, 잔뜩 죄어 있는 마음의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을 놓아 허공과 하나가 되는 자세이다.

일상의 무료함을 벗어나기 위해 요즘 젊은이들은 흔쾌히 시체가 된다. 기꺼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는 단순함, 지금 이 순간 숨을 멈추고 죽음을 연출할 수 있는 힘! 들숨과 날숨의 호흡 속에 삶과 죽음이 하나로 관통한다는 선가의 가르침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시체놀이가 단순한 ‘해프닝’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득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의 인터넷 용어)’의 경지, 우주심과 하나되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 승화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글│전채연 missingmuse@powerbr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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