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뇌를 자유롭게 하리라

놀이가 뇌를 자유롭게 하리라

뇌야 놀자

브레인 13호
2010년 12월 20일 (월)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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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간의 두뇌 활동 자체가 고도의 유희라고 보았으며, 인간은 놀이를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했다.



놀이에 살고 놀이에 죽는 인간들

호모 사피엔스(사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 등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정의한 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인간만큼 놀이에 열광하는 종도 없을 것이다. 추운 줄도 모르고 집 앞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노는 꼬마 녀석들부터 만화책을 읽거나 게임에 열중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는 청소년들까지, 오로지 노는 데 집중하느라 시간과 공간조차 잊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놀이에 집착하는 버릇은 어른이 되어서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어떤 놀이냐의 문제만 다를 뿐 도박과 게임에서부터 각종 엔터테인먼트에 이르기까지, 어른들이라고 놀이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전거 하나로 대륙 횡단을 감행한 라이더나 아무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이름 없는 수학자는 고상한 축에 속한다. 놀이에 빠진 인간은 대책이 없다. 놀이를 위해 시간과 재산도 탕진할 뿐 아니라 해야 할 일도 잊고, 먹고 자는 것도 잊는다. 그러다가 또 가끔은 소 뒷걸음에 쥐 잡듯 인류의 대발견에 동참하기도 한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호이징가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두뇌 활동 자체가 고도의 유희라고 보았으며, 인간은 놀이를 통해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했다. 또 호모 루덴스로부터 호모 사피엔스의 산물인 문화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즉 문화는 처음부터 유희되는 것, 목적이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노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놀이 속에서 비로소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놀 줄 안다는 편견을 버려

인간만이 놀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동물 행동학자 조너선 밸컴은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파리와 같은 곤충에서부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동물은 단순히 생존과 진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교미, 접촉, 놀이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1950년대에 있었던 올즈와 밀러의 쥐 실험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전기적인 자극이 뇌에 전달되면 쾌감을 느끼도록 쥐의 뇌에 전극을 심어놓고 쥐 스스로 스위치를 누르게 한 실험에서, 쥐들은 단지 쾌감을 맛보기 위해 시간당 7백 번이나 스위치를 눌러댔다. 심지어 어떤 쥐는 먹는 것도 포기하고 짝짓기도 잊은 채 스위치를 누르다가 죽기도 했다. 놀이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놀이에 쏟아 붓는 열정은 동물의 그것보다 한 차원 진화되었다. 일반적으로 동물들이 원초적인 식욕이나 성욕 등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고등 포유동물인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사고 작용을 놀이 또는 유희로 승화시킨다.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스티븐 나흐마노비치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글쓰기, 작곡, 그림 등의 모든 창조적 행동은 놀이의 다른 형태였으며, 예술가들에게 놀이는 독창적인 예술이 꽃피도록 하는 창조성의 뿌리”라고 규정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째서 만사 제쳐놓고 놀이에 몰두하는 걸까? 놀이에 빠진 인간의 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그러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즐거움이나 우울함 등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뇌에서 화학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신없이 놀이에 빠져 있을 때는, 뇌의 쾌감 중추가 자극을 받아 도파민이 생성된다. 도파민은 인간의 두뇌 바로 앞쪽 부위의 신경세포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행복감과 만족감 같은 쾌감을 전달한다.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하고, 초콜릿에 중독되고, 마약과 본드에 탐닉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이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해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도파민은 이런 외부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때, 지적 희열에 잠길 때, 반짝이는 별을 보고 미래를 꿈꿀 때도 풍부하게 분비된다. 이를테면 무언가 집중해서 제대로 놀고 있을 때 인간의 두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중독성은 한번 경험하면 좀처럼 끊기 힘든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놀이의 즐거움에서 점잖게 발을 뺄 수 있을까.


이처럼 뇌 과학적 기준에서 본다면 ‘놀이’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뇌에서 도파민이 풍부하게 분비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뇌에서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키워드는 ‘새로움’에 있다. 나이가 들면서 도파민의 분비가 점차 감소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경험하든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감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습관적으로 게임을 하거나 별 감흥 없이 TV를 시청하는 따위의, 흔히 ‘킬링 타임?을 위한 행동들은 뇌가 원하는 진정한 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놀이는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노느냐’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뇌의 관점에서 보면 운동에 젬병인 사람이라면 고역스러운 체육시간보다 재미있게 문제를  푸는 수학 시간이 훨씬 놀이에 가깝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동의 샘’이라 불리는 도파민이 분비되는 시점에 관한 것이다. 도파민이 분비되는 미세한 시간차에 주목한 정신의학자 그레고리 번스는 도파민이 단순히 쾌락과 관련해서 분비된다기보다는 어떤 만족스러운 상황을 예상할 때 분비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보다 그 목표를 상상하면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더 많은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어떤 것을 성취했을 때보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 자체에서 더 많은 만족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힘들게 억지로 일해서 얻은 성취보다 아무 대가 없이 즐기면서 한 놀이에서 더 많은 행복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를 즐기도록 프로그래밍 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성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 성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재미에 목숨 걸자

이처럼 인간의 뇌는 놀이 상태, 즉 긴장감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쾌활하게 자신을 풀어준 상태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경계심을 갖고 있으면 사고 기능이 마비돼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 매사에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가벼운 마음과 즐거움으로 임하는 것이야말로 뇌의 기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뇌는 그런 놀이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최고로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엇이든 그 자체로 즐기는 것, 매사에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자 가장 훌륭한 삶의 태도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각하고 느끼고 반성하고 창조하고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돈을 벌거나 자기의 권력을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사는’ 데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여겼다.  놀이를 순수하게 즐기는 인간만이 세상 온갖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놀이의 목적보다 놀이 자체를 즐기는 인간, 성취한 결과보다 그 과정에 몰입하는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대세다.

글·전채연
ccyy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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