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8월 3일 밤 고요한 평양 시내에 굉음이 울렸다. 평남도청이 폭발물로 파괴된 것. 이 거사로 이웃에 있는 경찰서 건물이 파괴되고 일경 2명이 폭살 당했다. 이 거사의 주인공은 여성투사 안경신(1888~미상)이었다.
당시 34살이었던 그녀는 단독으로 감행한 평남도청(8월 3일)폭탄 투척에 이어 다른 동지들과 신의주 철도호텔(8월 5일), 의천경찰서(9월 1일)에 폭탄을 던졌다.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보다 12년 앞선 일이었다.
▲ 대한애국부인회 검거문서에 기록된 안경신 선생의 본적과 나이(자료=독립기념관)
안경신은 왜 폭탄을 던졌던 것일까?
“3·1 만세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방법으로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같은 1회적 효과가 주효할 것으로 믿고 있다.”라고 ‘비밀결사대한애국부인회 검거’시에 안경신은 일본 고등경찰에게 그렇게 당당히 말했다. (1920.11.4, 高警 제33902호)
안경신은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하였는데 이 단체는 중국 동삼성 지역에 있는 각종 항일투쟁 단체를 망라하여 통합한 전투 단체로서 192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 단체의 투쟁목표는 일제의 착취기관, 정책수행기관 폭파와 침략의 수뇌부 인사 사살이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의원단 100여 명이 동양 시찰차 한국도 통과한다는 정보가 광복군 총영에 입수됐다. 총영에서는 조국 독립에 관한 영문 진정서 43통을 작성, 임시정부를 통해 제출케 한 뒤 국내의 일제 통치기구들을 파괴하고 일본 관헌들을 암살하여 세계의 여론을 환기할 계획을 세웠다.
▲ 안경신 선생 체포를 보도한 1921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자료=독립기념관)
이에 7월 25일 결사대를 3대로 편성해 폭탄, 권총 및 전단(4만 장)을 배포하였는데 결사대원은 안경신을 비롯해 임용일, 정일복, 박경구, 김영철 등 16명이었다. 평양을 담당한 안경신은 대원들과 7월 15일 총영을 출발, 국내로 잠입하던 중 안주에서 검문 검색하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도보로 평양에 입성했다.
당시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여성의 몸으로 거사를 위한 폭파용 폭탄을 비밀리에 반입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거사 시에 안경신은 홑몸이 아닌 임신 상태였다. 거사 후 피신하여 있던 중 8개월 만인 1921년 3월 왜경에 체포될 때에는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핏덩이 아기와 함께 투옥되었다.
안경신의 사형 소식이 상해 임시 정부에 전해지자 김구와 장덕진 등이 탄원서와 석방 건의문을 보내 10년 형으로 감해졌다. 그런데 안경신은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라며 재판장을 꾸짖고 당장 석방하라는 불호령을 내려 간수가 가까스로 형무소로 송환했다.
출옥 후 안경신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핏덩어리를 안고 형무소로 잡혀갔던 안경신의 출옥 후 생활은 물론 사망 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 5월의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자료=독립기념관)
한편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안경신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5월 한달 동안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연다.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